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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내 교복 왼쪽 가슴에 달려있던 명찰엔 분명 '林相毛(림상모)'라고 써 있었다. 지금도 한자 표기는 그대로다. 그 중 성씨의 '林'은 알다시피 '수풀 림'자다. '임'으로 발음되지 않는 글자다. 그럼에도 한글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임'으로 변질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지배하던 1933년, 조선어 철자법 개정안에 의거해 한글 맞춤법이 개정되면서 두음법칙이란 게 생겨났다. 그 시행 배경에 관한 설명은 다른 기회로 넘긴다지만 그 후에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두음법칙 이전의 철자로 이름을 사용해왔다.

두음법칙은, 우리 말 첫 글자로 시작되는 'ㄹ' 등은 'ㅇ'으로 바꿔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두(語頭)에 자음군(子音群)이 올 수 없게 했다든지, 유성 파열음이나 합용병서(合用竝書) 금지 법칙 등이 그것이다. 세월이 감에 따라 두음법칙 사용이 자리를 잡아갔던 건지…. 어느 날 내 이름은 나의 동의 없이 '림상모'가 아닌 '임상모'로 성형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자매와 친척들도 다 그렇게 되었다. 국가가 우리 씨족의 성씨를 임의로 변경해버린 것이다. 우리 성씨 뿐 아니라 그 글자의 범주에 드는 다른 성씨들도 대부분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내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뭔가 도적맞은 듯 허전하고 분한 마음이었다.

내 친척이나 다른 성씨의 사람들도 그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지는 모르겠다. 일반 문장 속에서의 두음법칙 타당성 여부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더 말할 것 없이 사람의 이름은 고유명사다. 고유명사는 시간 공간을 불문하고 바꿔 쓸 수 없는 고유한 이름인 것이다.

이에 늙은 나이지만 본래의 성을 찾아쓰고자 지난해 9월, 법원 개명담당자를 찾았다.

"어째 오셨나요?"

화난 듯한 그의 표정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법원이나 검찰 등 사법관청에 드나든 서민이라면 겪어봤음직한 표정들일 테니 말이다.

"내 이름이 림상모인데 언제부터인가 임상모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성씨를 찾아쓰려고요. 그게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선생님 북한에서 왔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한 말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게 내 귓전를 때렸다.

지금 이 나라가 '좌빨'이니, '북한'이니 하는 말에 경기가 들만큼 예민해져 있는 형편임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고유명사에 있어서 'ㄹ' 발음의 구사마저 그 방면으로 연결되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북한이라니… 내 조상은 저쪽 진천이라는 곳에서 1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살아온 사람이유. 워째 그런 소리가 나오실까?"
"거 뒤에 신청서 있어요. 가지고 가서 작성해 오세요."

내 말은 들어둘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그 신청서를 가지고 나와 동 주민센터 등 몇 군데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전화질을 해봤다.
그러나 늙은 축에 드는 나의 정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장벽이 곳곳에 있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이에 따른 민원이 빈발했고 소송도 이어져 지난 2007년 7월 대법원이 관련 판결을 내놨다. 신청자에 한해 적정 서류를 갖춰 제 성씨를 찾아가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서류를 갖춰 신청했더라도 본래의 성을 찾아 내 것으로 다시 회형(回形)시키기까지 겪어야 할 부담이 너무 커서 신청했다가 포기하는 사례가 태반이라는 점이다.

주민등록을 고쳐야 하고, 운전면허증이나 각종 자격증을 갈아야 하며 여권도 바꿔야 되고, 은행 통장, 보험 증권 등 수십 년간 살아오며 매일 사용했던 각종 문서를 수정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그래서 제한적이라 했는진 모르나 신청자들이 바라는 것은, 개명 확인서만 제출하면 모든 증서가 무료로 변경 가능하도록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엄청난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그보다도 관청의 국가 및 사회 역사인식이 객관화되지 않으면 민원인들의 불편은 발품팔아 돌아다니는 것 이상의 장벽으로 남을 것이란 점을 이번 일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비겁하지만 그 장벽 앞에서 나는 성씨 변경하기를 다음 기회로 미뤘다.


#개명 담당자#법원#두음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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