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이 돌아왔다. 아, 오해는 마시라.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고 있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요정을 말한 건 아니니까. 인디음악 팬들이 열광하는 건 인디계의 요정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본명 이진원, 이하 달빛요정)의 컴백이다.
'절룩거리네', '스끼다시 내 인생' 등의 대표곡으로 대중음악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그가 지난 3월 3일 3.5집 비정규앨범 (EP) '전투형 달빛요정-Prototype A'로 또 한 번 팬들과 대중 앞에 섰다. 1년 5개월 만에 새 앨범으로 돌아온 달빛요정을 지난달 22일 서면으로 만났다.
혹자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란 밴드의 이름조차 생소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 밴드의 정체는 달빛요정 '이진원' 그 자체다. 그 혼자 작사, 작곡, 편곡, 레코딩, 믹스까지 맡고 있는 1인 밴드이기 때문이다.
'달빛요정'이란 이름은 그가 중학교 시절 보았던 박봉성 작가의 만화에 등장한 프로젝트 비밀 조직의 이름에서 따왔다. 거기에 단순히 야구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반영해 '역전만루홈런'을 뒤에 붙인 것이라고.
달빛요정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2008년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그랬던 것처럼, 2003년 발표한 그의 1집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의 대표곡 '절룩거리네'는 당시 신해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에서 5주 연속 인디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달빛요정'이 돌아온 이유, '2009년 5월''패배주의의 결정체'라는 평을 들으며 본의 아니게 요정이 '루저킹'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당시 한정판으로 자체 제작한 1집 앨범은 발표 25일 만에 매진됐고, 재발매 이후 1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의 앨범이 골방과 지하실에서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던 관계자들이 그의 성공에 혀를 내두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후작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요정의 말대로 "주류로 편입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1.5집 <소포모어 징크스>와 2집 <스코어링 포지션>은 그에게도, 팬들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앨범이었다. 그래서였을까. 2008년 발매한 정규 3집 <굿바이 알루미늄>을 끝으로 달빛요정이 음악 활동을 접는다는 이야기도 들려 왔다.
"그때는 정말 '음악을 관둘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3집 앨범의 콘셉트가 '실패한 뮤지션'이다 보니 작업을 하면서 제가 만든 가상의 인물에 동화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이게 진짜 내 모습 같기도 하고요." 그랬던 그가 '전투형' 달빛요정으로 돌아온 건 그래서 더욱 반가운 일이다. 이번 앨범에는 타이틀곡 '축배'를 포함한 총 4곡의 신곡(입금하라, 나는 개, 피가모자라)과 3집 앨범에 실렸던 노래를 재편곡한 2곡(치킨런 sad ver., 고기반찬 rock ver.) 등 총 6곡이 실렸다.
전작에서 느껴졌던 '루저'스러운 그의 시각은 이번 앨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앨범의 제목대로 그의 노래를 '전투'적이라고 평해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왜 나를 빨갱이로 만들어/ 왜 나를 혁명가로 만들어"라는 가사처럼 군데군데 다소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달빛요정은 그저 "솔직한 음악을 결심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음악을 만들게 된 계기는 2009년 5월의 '그날'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6년 하고 지쳐서 1년 쉬려고 했는데 2009년 5월에 각성을 하는 바람에 별로 쉬지도 못하고 3.5집을 냈습니다. 전투라면 전투(제 표현대로라면 솔직한 음악)를 결심하게 된 때도 2009년 5월입니다. 그게 어떤 때인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겁니다. 그 계기를 통해 제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조금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음반을 듣고 누구를 상대로 한 전투인지 생각이 난다면 제 의도가 옳게 전달된 것이고요. 잘 모르겠다 싶으면 메카닉 로봇물의 주인공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라고 설정하시거나, 달빛요정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새노래 '나는 개'는 유통기한이 있는 노래
"왜 날 빨갱이로 만들어/ 왜 날 혁명가로 만들어/ 네가 아니어도 나는 개/ 왜 날 광장으로 내몰아/ 왜 널 상대하게 만들어/ 네가 아니어도 나는 개 너는 쥐/ 나는 개 너는 쥐" - 3.5집 '전투형달빛요정-Prototype A' 수록곡 <나는 개> 가사 中이번 앨범 수록곡 중 가장 화제가 됐던 노래는 단연 '나는 개'다. 듣는 즉시 누군가를 '번뜩' 떠올리게 만든다는 직설적인 가사가 인터넷을 통해 먼저 화제가 됐다. 앨범 발매 전 달빛요정 스스로 MLB PARK(국내 야구 관련 커뮤니티 중 가장 큰 규모의 웹 사이트)를 통해 한시적으로 음원을 공개했던 것도 한몫 했다. 노래를 들은 팬들은 '속이 다 후련하다'며 열광했다.
"이 노래 때문에 만들어진 음반이 3.5집이기도 합니다. '왜 날 빨갱이로 만들어'라는 가사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 가사를 중심으로 가사를 쓰다 보니 그 당시 제가 느끼고 있던 안타까움이 잘 표현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 써놓고 나서는 이 노래는 유통기한이 있는 노래구나. 2012년까지 밖에 쓰일 수 없겠어, 그 다음에도 불린다면 나는 이 나라에서 살지 않을 테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던, 저한테는 안타까운 노래입니다."한편 일부 팬들은 '이러다 요정이 잡혀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표하기도 했다. 역시나 가사의 직설적 표현에 대한 우려다. 노래의 정치적, 사회 비판적 요소는 둘째 치더라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다는 측면에서 달빛요정 또한 자유롭진 않은 몸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의 노래 중 "그나마 들을 만하다는 노래 두 곡('절룩거리네'와 '스끼다시 내인생')이 공중파 방송금지곡으로 묶여 별다른 홍보도 할 수 없었던" 시절도 경험한 전적이 있다.
"물론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든 노래를 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노래는 나밖에 쓸 수 없으니까, 나는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지킬 게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섹스에 대한 표현은 자유로워 졌는데 왜 '절룩거리네'는 방송금지처분을 받았을까요. '절룩거리네'가 방송금지처분만 받지 않았어도 저는 지금 러브송을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요. 이번 앨범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고 비난하시는 분들도 있고 좋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분명 어떤 응징이 있기는 할 겁니다. 다 받아들일 겁니다. 로커라면 주민등록증에 빨간 줄 하나는 있어야죠. 제 민증의 빨간 줄과 표현의 자유를 맞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설마 고문은 하지 않겠죠.(아픈 건 싫어요)""많은 이들이 보수화 되는 세상, 나도 그렇게 될까 두렵다""이 땅의 정의는 made in China/ 결국엔 나도 똑같다/ 정의가 있네 없네 잘난 척 하고 있지만/ 1억만 주면 닥칠 것이다/ 입금하라 정말로 닥치는지" - 3.5집 '전투형달빛요정-Prototype A' 수록곡 <입금하라> 가사 中달빛요정은 노래 가사가 "곧 자신의 일상이자 일기"라고 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만큼 재밌는 구경도 없다지만, 그의 일기는 단순히 '남의 일'이라고 단정하기엔 '내 얘기'처럼 공감이 가는 구석이 많다. '정의가 있네 없네 잘난 척 하고 있지만 1억만 주면 닥칠 것'이라는 '입금하라'의 가사만 봐도 그렇다. 달빛요정이 자칭 타칭 '가사빨로 먹고 사는 밴드'라 불리게 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의 고민이 음악을 듣는 우리 모두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제의가 들어온다면 저는 날름 받아서 작업실 만들고 평생 러브송만 만드는 뮤지션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도 편하게 '음악만' 하고 싶거든요. 그리곤 1억을 지키기 위해, 더 불리기 위해 온갖 애를 쓰겠죠. 뮤지션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수많은 소시민들을 비웃고 있지만 결국 저도 똑같아 지는 거죠.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비난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그렇게 변절해서 보수화됩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겁니다. 그게 좀 두렵긴 합니다." 언제나 가사를 중심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그는 이번 신곡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가사로 수록곡 <입금하라> 중 '이 땅의 정의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는 부분을 꼽기도 했다.
"(이 가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단 한마디로 압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짝퉁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대량생산된 싸구려 물건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돈만 있으면 더 좋은 다른 걸 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 가사를 쓰고 나서, 이 노래 중국 사람들이 싫어하겠네, 화교들한테 칼 맞아 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으로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진 않거든요. 비유라는 게 꼭 하나만을 지칭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느끼는 그것이 정답 입니다."이번 앨범에는 이외에도 "유일하게 방송 심의가 날 것 같은" 타이틀곡 <축배>와 "우리 제발 떳떳해지자는 스스로의 다짐과 부탁"을 담은 <피가 모자라> 등의 신곡이 담겼다. <축배>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우리나라의 장례문화가 '축제'와 닮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피가 모자라>는 서태지의 백워드 마스킹 소동(서태지와 아이들 3집 앨범에 실린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돌리면 '피가 모자라'라는 귀신소리가 나온다는 소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서태지에 대한 빠심의 표현이기도 하고, 별 것도 아닌 걸 과장해서 보도하는 매스미디어의 선정성에 대한 노래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그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민주주의에는 피가 필요하다'는 명목 아래 역사 속에서 늘 희생됐던 소시민의 피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노래이기도 하다.
기타 녹음 끝나면 기타 팔고, 다시 마이크 사고...
그의 이번 앨범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제작됐다. 나아진 게 있다면 1집과 달리 사람이 직접 친 드럼소리로 녹음했다는 것, 그리고 음악을 오래 하다 보니 여러 뮤지션들과 친분이 생겨 음악장비나 편곡에 대한 조언 등 음악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 앨범에서는 음악적으로 욕심내던 부분을 포기하고 보다 자연스러운 사운드를 내는 데 주력했다.
"그 전까지는 제가 마음에 들 때까지 연주를 반복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전체 사운드 이미지를 해치지 않는다면 첫 번째 연주들을 거의 살려서 녹음했습니다.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럽더라고요. 예술을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니 새로운 세상이 열리더군요."하지만 이전보다 힘들었던 점도 많다. 먼저 지난겨울 신종플루에 걸린 채로 앨범을 녹음해야 했다. "반지하방에 살다보니 목관리가 쉽지 않았다"는 게 그의 속사정이다. 작업을 하는 동안은 악기와 장비를 샀다가 다시 팔아가며 노래를 만들었다고. 모든 것을 혼자 녹음하는 상황이다 보니 경제 사정상 여러 장비들을 동시에 소유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타 녹음이 끝나면 기타를 팔고, 그 돈으로 보컬 녹음을 위한 마이크를 사고, 또 보컬 녹음이 끝나면 마이크를 팔고 믹스할 장비를 사고, 믹스가 끝나면 마스터링·프레스를 위해 장비를 또 파는 식이었다. 앨범이 나온 뒤에는 공연을 위해 또 다시 기타를 사야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아주 지긋지긋"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앨범 완성도에는 별 영향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여태껏 동시에 같은 장비를 소유해 본 적이 없어서 비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노래를 불러보는 게 꿈"이라고 한다. 2009년 5월 '그 날'을 계기로 '전투형'달빛요정이 되지 않았더라면, 요정은 사랑 노래로만 구성된 '연애형' 달빛요정을 발표했을 지도 모른다. 이번 앨범에 적힌 그의 말대로 "몇 년째 모아만 놓고 있는 러브송들이 빨리 발표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러브송으로만 구성된 달빛요정 1집을 준비 중입니다. 한 달에 한 곡정도 곡 작업을 해서 내년 정도쯤에요. 노래들이 만들어진 시기들이 대부분 2000년 이전인지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0집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겠습니다. 일단 달빛요정 1집을 만들면서 4집 앨범 노래들도 정리하려고 합니다. 대략 노래들이 나와 있긴 합니다. 돈만 있으면 앨범은 1년에 석 장도 발표할 수 있습니다.""6번 타석에 서, 2안타는 친 것 같다"달빛요정은 당분간 앨범 활동에 전념할 예정이다. 오는 4월 18일 일요일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열리는 앨범발매 단독공연이 그 시작이다. 클럽 공연 또한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계획하고 있다. 이번 앨범보다 먼저 나왔어야 할 그의 개인 수필집도 작업이 완료되는 대로 출판할 예정이다. 책이 나오면 책 발매 공연도 따로 할 것이라고 한다. 올해 여름에 집중되어 있는 국내 록페스티벌에도 출연하고 싶다는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그가 '달빛요정'이란 이름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8년째다. 올해를 바쁘게 보내고 싶다는 그에게, 그의 이름대로 '역전 만루 홈런'을 터뜨릴 날은 언제쯤 찾아올까. 하루빨리 그 영광의 순간이 오길 바란다.
"일단 타석을 계속 나가고 있다는 데 가벼운 만족을 합니다. 1집부터 3.5집까지 총 6장의 앨범을 냈으니 6번 타석에 설 기회가 있었고 그 중에 2안타 정도는 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제 노래들은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립니다. 언제까지 음악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타석에 설 기회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늘고 모질게 2할 5푼, 수비형 백업 선수로라도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까지는 타석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래도 음악을 하니까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