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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70년대 말, 내가 군에서 들은 무서운 이야기와 그로 인해 모골이 송연해진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후방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장점만을 보고 전투경찰에 자원입대했고 배치를 받은 곳은 경남 동해안 해안초소였다. 동해바다가 좋다지만 만하루 동안이라도 종일 잔잔한 바다를 본 기억은 없다. 아침나절에 고요하던 바다는 오후가 되면 필히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는 황량한 바다로 바뀌기 일쑤였다.

그때만 해도 심야에 바다를 통해 간첩들이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고 우리는 밤과 낮을 거꾸로 해안경비를 하는 해안경비초소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배치받은 00전투경찰대 1소대 3분대는 고리원자력발전소를 돌아 고갯길을 오르내리면 나오는 '효암'이라는 마을에서 조금 들어가면 있는 곳으로 국가중요 시설인 원자력발전소가 있어 밤새도록 해안경비를 허투루 서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경남지역은 남해안 대대와 동해안 대대로 나누어졌는데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남해안은 그래도 높은 사람들이 순찰을 자주 오지 않아서 근무하기 편하다는 말을 들은 반면, 내가 근무하던 동해안은 해안순찰 도로가 잘 발달되어 초소 코앞으로 순찰차가 불시에 들이닥칠 수가 있어 그야말로 날밤을 새우며 근무해야되는 고달픈(?) 환경이었다.

내가 들은 무서운 이야기는 남해안인지 아니면 동해안인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방위병이 있으면 방위병을 데리고 아니면 혼자서 그날 배치된 초소로 가게 된다. 무거운 M1소총-70년대만해도 전투경찰에는 2차대전때 사용하던 미제 M1 구닥다리 소총이 개인화기였다-과 실탄이 든 탄창, 일명 '삐삐전화기'라는 전화선을 이어서 초소 간에 사용하던 무거운 전화통, 조명탄, 판초우의와 같은 장비를 가지고 터덜터덜 해안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그날 밤을 새울 곳을 향해 떠나는데 그럴때면 나는 언제나 고참들이 들려준 그 무서운 이야기에 뒤통수가 땡기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해안초소에서 있었던 일이라카이. 정말이데이..."

그 당시의 해안초소는 밤새도록 '탐조등'으로 밤바다의 '의아선박'을 찾아 비추는 것이었다. 공해상으로는 레이더가 잡지만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조그만 침투용 선박을 타고 간첩들이 해안으로 밤에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대원들은 탐조등이라는 옛날 극장의 영사기 비슷한 장비를 가지고 밤바다를 비추었다.

우리는 카본 탐조등을 사용했는데 탄소막대 두개를 강한 전류로 태워 일으킨 빛으로 시원하게 밤바다를 비추었다. 그 탐조등은 열을 발생함으로 5분 비추고 10분 쉬고 하는 등의 수칙을 지키며 인근 초소와 교대로 밤바다를 비추며 지켰다. 그 탐조등은 탐조실이라는 돔형의 작은 시멘트 구조물에 들어 있었다. 단 두명만이 겨우 들어가는 탐조실은 마치 축소형 석굴암과 같은 돔식 구조로 생겼는데 우리는 겨울이면 덜덜 떨며, 여름이면 모기와 싸우며 아무도 없는 밤바다를 비추었다.

이야기는 이 탐조실에서 일어났다. 어느 초소 탐조실 뒤에 이름모를 무덤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무연고 시체가 바닷물에 밀려와 해안에서 거두어 인근에 묻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날 실연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바다로 투신했는지 젊은 처녀의 익사체가 밀려와서 탐조실 뒤편에 묻었다고 했다.

어느 신병이 배치받아 그 탐조실에 혼자 밤에 근무를 하고 있었단다. 다들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로 군입대를 하였지만 밤새도록 탐조실에서 졸음과 싸우며 새벽까지 탐조등을 껐다 켰다 돌리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제일로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탐조실에서 수칙대로 탐조등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근무자가 졸고 있음이 드러나 탐조실 근무는 요령을 피울 수 없어 대원들은 제일로 꺼려했다. 그래서 말단 쫄병이 탐조실 붙박이가 되곤 했다. 집요한 수마(睡魔)의 공격에 탐조실 근무를 서던 신병은 탐조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꿈을 꾸었는데 꿈의 배경이 묘하게 바로 그 돔형 탐조실 안이었다. 어떤 묘령의 아가씨와 만나는 꿈을 꾸다 얼핏 깬 신병은 비몽사몽으로 탐조등을 돌리려 했는데 꿈의 배경과 자신이 지금 있는 탐조실 안이 너무도 똑같아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아 그 아가씨가 아직 있나 살피다가 현실감각을 찾았다.

'내가 꿈을 꾸었단 말야? 그럼 그 아가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파도에 밀려와 퉁퉁 불은 시체를 탐조실 뒤에 묻었다는 그 무덤이 생각났고 그 길로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소총도 팽개치고 초소로 미친듯 뛰어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르지만 무연고 봉분이 두엇 놓여진 우리 초소의 탐조실 근무를 할 적이면, 특히 비라도 부슬부슬 오는 밤이면 그 이야기에 머리끝이 쭉 올라가곤 했다.

귀신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에는 칠흑같은 밤이 등장하지만 내가 겪은 바로는 제일로 무서운 밤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해안초소의 불빛하나 없는 밤에는 중대장, 소대장의 순찰이 끝난 새벽 서너시에 자신의 근무지에서 졸다가 눈을 뜬 대원이 깜깜해 무섭지 않은데 밝은 보름날이면 그 밝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밝아서 꿈결처럼 낮인지 밤인지 구분을 하지 못하는 그런 밤이 된다. 그럴때면 깬 잠을 다시 깨어 나려고 발버둥치며 낮과 밤을 혼동하는 묘한 상태가 되고 이럴 때 나는 가장 무서움을 느꼈다.

탐조실로 올라갈 적이면 고참에게 들은 귀신 이야기에 뒤숭숭하기 마련인데 보름날에는 졸다가 깨면 영락없이 그런 묘한 경험을 했다. 그날도 보름날이었다.

한참을 졸다가 언뜻 잠에서 깼는데 눈앞에 무언가 흰 것이 푸다닥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연고 무덤의 뒤편으로. 순간 고참에게 들은 이야기와 함께 자동으로 몸의 모든 모공이 닫히고 머리칼이 일직선이 되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라 경북 예천 출신의 어진 고참과 함께 졸고 있었던 터라, "안 상경요! 저 무덤 뒤에 무신 흰 것이 지나갔소!"하고 흔들어 깨워서 덜덜거리며 둘은 플래시로 그 흰물체를 찾아 나섰다.

인가도 없는 이 외진 해안가에 한밤중 흰물체라니... 그것도 처녀무덤인지 총각무덤인지 알 수 없는 그 무덤 뒤로 무언가 흰 것이 분명 지나갔는데...

찾고 보니 '레그혼'이라는 흰색의 닭이 그 밤중에 무슨 이유로 해안을 나다니는지 우리 손에 잡히고 말았다. 그 흰닭을 매복지에서 발견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왜 그닭이 인가도 없는 그 해안초소에서 밤중에 방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제일 쫄병으로 '밥쟁이'였던 나보고 횡재했다며 고참은 닭죽을 끓이라며 그 닭을 잡으라 했지만 도회지에서만 자란 나는 닭을 잡는 것도 몰랐고 본 적도 없었다. 무슨 닭 깃털을 빼서는 닭의 귀를 자극하면 닭이 그냥 죽는다는 그런 묘법을 듣긴 했지만 그 닭을 잡지는 못했다. 그냥 닭모가지를 비틀려다가 닭이 후다닥 바다로 도망쳐서 고참에게 핀잔을 받고 나서야 그들이 익숙하게 그 닭을 잡는 광경을 목도했다.

비법은 없었고 그냥 닭모가지를 비틀더니 해안가 몽돌에 그 모가지를 대어놓고 조자룡 헌칼 쓰듯 초소 부엌에서 가지고 온 부엌칼로 썰렁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밤중에 내 수명을 단축시키고 욕바가지를 덮어씌운 그 닭에게 원망이란 원망은 다해가며 희멀겋게 닭죽을 끓였다.

아직도 여름이면 그 경남 해안의 무연고 봉분을 뒤에 둔 그 탐조실에서 고참에게 들은 이름모를 신병이 꾼 귀신꿈과 함께 내가 겪은 밤중의 방황하던 흰닭과의 싸움이 생각난다.

덧붙이는 글 |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꿈과 현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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