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으로 가는 초대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걸어서 만나는 세상에 중독되고 나면 차나 기차 등 탈 것에 앉아서 스쳐가며 바라본 그 어떤 풍경도 우리 마음에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두 발로 걸을 때, 비로소 세계의 풍경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우리 역시 그 세계의 일부가 된다.
두 발로 걷는 순간, 다리와 팔과 눈과 귀와 피부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공기 중의 무수한 입자들이 살갗으로 파고 들어온다. 피상적이던 우리의 존재감이 커지고 우리는 이 세계 안에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세계를 느끼기를 원한다.
제주올레길을 작년부터 걷기 시작했다. 주말을 이용해 드문드문 걸은 길이 어느덧 1코스, 6~14코스다. 이 섬이 간직한 야생적인 아름다움 속을 두 발로 헤매다닐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누군가 내게 제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을 묻는다면 여전히 한라산이라고 대답하겠지만, 올레길에는 산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종류의 위안이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연푸른 바다빛과 밀려오는 파도, 드넓은 평원과 마른 억새의 향취에 반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길 위의 사람들이 마음을 채우기 시작한 길.
첫 번째로 걸은 길은 올레 1코스, 작년 2월에 걸었다. 제주엔 전에도 왔지만 그 속살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대지와 바다를 만날 수 있을 줄은 예상 못했다. 걸어서 만나는 제주의 풍광은 드넓고 다채롭고 야생적이었다. 검은 현무암의 나즈막한 돌담, 당근과 감자를 캐는 검은 흙밭,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 두 개의 오름과 오름에서 내려다본 해안의 절경, 한치를 말리는 바닷가, 깨끗한 공기, 맑은 물빛, 바람, 그리고 하늘.
1코스의 백미는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포 일대의 정경이리라. 억새를 벗삼아 언덕길을 오르면 탁트인 숲과 들판이 동서남북 한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오름이 솟아 있고, 겨울인데도 밭은 푸른 채소로 가득하다. 해안선을 따라 바다로 시선을 돌리면 둥그스름한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한다. 그 수평선을 따라 우도와 일출봉이 나란히 누워 있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은 개인 소유의 땅인데 올레꾼들에게 개방되었다 한다. 지도에는 이 둘을 합쳐 '두산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말미오름은 소가, 알오름은 말이 방목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 귀한 땅이 개발에 쓸려가지 않고 살아남은 것 같다.
알오름을 지날 때부터는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제주의 거센 바람, 잠시도 멈추지 않고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내 온몸을 휘감아들며 몰아치던 바람을 거기서 만났다. 아마 내 생애 이토록 큰 바람을 맞아본 건 처음이지 싶다. 머릿속까지 얼얼해질 정도였지만, 제주의 모든 것을 한층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바람. 이 바람은 종달리 해안도로를 걷는 내내 계속되었다.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화살표는 어느새 성산일출봉 앞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올레길에는 코스마다 길잡이가 있는데 1코스의 길잡이는 성산일출봉이다. 올레 1코스는 온종일 일출봉을 바라보며, 일출봉을 향해 걷는 길.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일출봉과 마주하게 되는데, 예전에 버스에서 내려서 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오래 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반갑고 친숙하다. 5시간 넘는 바라봄과 기다림 끝에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된 것일까.
종점 광치기 해안을 향해 걸어갈 무렵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갈매기 한 마리에게 인사하고 올레길을 돌아나왔다. 노곤함이 서서히 밀려왔는데 깊고 평온한 노곤함이었다. 다른 일정 때문에 이 하루로 올레길을 접는 것이 아쉬울 뿐. 허나 가슴 속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를 듣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시간,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길이 끝나는 곳까지 계속해서 걷고 싶다고. 몸과 마음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끝없이 걸으면서 이 끝없는 세계와 영원히 마주하고 싶다고. 이 세계와 영원한 입맞춤을 나누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