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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참치가 스시의 꽃으로 피어나다

『미스터 초밥왕』 3권 참치 시식 장면
▲ 참치 뱃살 『미스터 초밥왕』 3권 참치 시식 장면
ⓒ 1992 Daisuke Teras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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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홋카이도 오타루의 스시 대회. 영세한 스시 가게의 아들 쇼타(将太)는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회에 출전한다. 심사위원들 앞에 그가 선보인 스시는 참치로만 구성된 일명 '참치잔치(マグロ尽くし)'. 이를 눈여겨 본 한 스시 장인이 쇼타의 참치를 한 점 한 점 맛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마지막 세 점을 남겨두고 그가 말한다. "뱃살이야말로 스시의 꽃!"

테라자와 다이스케(寺沢大介) 作 <미스터 초밥왕>(원제: 『将太の寿司(쇼타의 스시)』)의 한 장면이다. 지방이 윤기 있게 감도는 스시의 꽃을 마주한 스시 장인의 뱃살 예찬은 시상식의 드럼소리마냥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이윽고 뱃살 시식을 마친 장인의 평가는 한층 더 미학적이다. "지방이 분홍색으로 눈처럼 아름답게 맺혀있고 표면도 반들거리며 촉촉한 최상의 대뱃살! 살살 녹는 듯한 맛, 톡 쏘는 듯한 산미가 지방의 맛과 어우러져 입 안 가득 따뜻한 만족감이 퍼진다!"

참치에 대한 일본인들의 편애는 전 세계적으로도 이미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쿠로마구로(黒マグロ)라고도 불리는 혼마구로(本マグロ)류(類)는 최고급 식재료로 분류될 정도이다. 그러나 200여 년 전의 일본인이 이 모습을 본다면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다. 18세기 후반까지 참치를 포함한 붉은 살 생선은 빠른 부패 속도 때문에 일본인들의 식탁에 오르지 못하는 하급 어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구로의 다른 이름인 '시비(しび)'는 '죽음의 날(死日)'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유독 천대받았다.

그렇다면 참치는 언제부터 일본인들의 혀와 가까워지게 된 것일까? 도쿄의 향토음식으로 출발한 스시는 참치의 신데렐라 성공기를 가능케 해 준 주역이다. 흔히 알고 있는 스시의 기본형인, 식초를 섞은 쌀밥 위에 와사비와 얇게 썬 날생선을 얹은 '니기리즈시(握りずし)'는 에도시대 문정(文政, 1818~1829년)연간에 탄생했다. 그 전까지 스시는 발효음식이었으며 이는 냉장·냉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묘안이었다. 19세기 초 에도(江戸, 도쿄의 옛 지명)의 하나야 요헤이(華屋與兵衛)는 전통방식의 스시 대신, 빠른 조리가 가능한 스시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계란부침, 전복, 전어, 뱅어, 새우, 다시마 등을 주재료로 만든 니기리즈시가 에도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스시는 노점에서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았다.

참치 역시 소위 에도마에즈시(江戸前鮨, '에도마에'는 도쿄만에서 잡히는 어패류를 가리킨다)라고 불리는 스시의 주재료 중 한 가지였다. 그러나 냉장·냉동기술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였으므로, 참치를 날로 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대의 스시 장인들은 얼음 대신 간장으로 참치 보관문제를 해결했다. 참치의 등살을 간장에 절여낸 참치가 한 움큼의 쌀밥 위에 올라갔다. 단, 뱃살 부분은 높은 지방 함량으로 인해 부패속도가 빠르고 절임에도 적합하지 않은 부위였던 탓에 '고양이조차 입에 대지 않는 생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이 미국 제너럴모터스사(GE社)의 냉장고를 수입, 판매하기 시작한 시점이 1928년, 시바라우제작소(芝浦製作所)에서 전기냉장고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였으므로, 신선한 참치뱃살에 대한 일본인의 기호(嗜好) 역시 냉동기술이 보급될 때까지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신선한 참치 초밥은 일본에서도 20세기 이후에야 보편화 된 음식이다.
▲ 오늘날의 초밥 신선한 참치 초밥은 일본에서도 20세기 이후에야 보편화 된 음식이다.
ⓒ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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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변화는 비단 기술의 발전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백만이 넘는 인구를 껴안은 메트로폴리스 도쿄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 소비, 취향의 대중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서구의 육식습관과 함께 기름진 중국요리가 유행하면서 붉은 뱃살 역시 도쿄인들의 별난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당대 도쿄의 4대맛, 즉 장어, 텐뿌라, 소바, 스시 중 스시, 그 중에서도 참치뱃살은 이제 예찬론이 나올 정도로 과거의 천대받던 지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참치 예찬자 중 한 사람이었던 나가세 가노스케(永瀬牙之輔)의 말을 빌려본다. "옛 어시장에서 '마구로데이'가 번창하고, 중국요리가 유행하는 것은 분명 담백한 맛에 싫증 나버린 현대인이 진한 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화족(華族) 부인, 여학생도 뱃살이 맛있다 하고 어린 애들도 '10전(錢)만 주세요. 참치뱃살 사먹게.'라고 말하는 시대다." (『すし通』, 1930)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도쿄에 거주했던 스시 장인들은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인구의 이동은 언제나 부산물을 동반한다. 에도식 니기리즈시의 전국화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붉은 살 생선을 기피하는 콧대 높은 칸사이(関西) 사람들의 취향은 여전했다. 싱싱한 참치 뱃살에 대한 애호가 전국화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냉동기술의 발전, 참치 시장의 거대화, 고도성장에 따른 취향의 고급화는 일본이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후부터 진전되었다.
     
진보하는 기술, 날로 먹는 참치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2차 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권리의 회복은 국가의 통치 뿐 아니라 바다이용에 대한 권리까지 미쳤다. 북양(北洋), 남양(南洋)으로 동력선을 띄워 해산물을 잡아 나르던 제국일본은 패전 후, GHQ 점령 하에 놓인 7년 동안 원양어업 제한조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의 어선들에게 평화조약의 발효는 곧, '이제 다시 넓은 바다로 나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일본정부 역시 어장 확대에 힘을 쏟았다. 54년 수산청(水産廳)은 연안어업의 과잉어획을 제한하기 위해 '연안에서 근해로, 근해에서 원양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근해 및 원양전환어업에 대한 우선적 허가제도와 대형선박 건조를 위한 저리(低利)융자를 추진했다. 원양어업으로의 전환이 특히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부분은 참치어업이었다. 일본의 특례법 실시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결과,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의 어장으로 확대된 일본의 참치 생산량이 1953년의 13만 6천 톤에서 1963년에는 53만 3천 톤까지 증가했다. 일본정부가 이렇게 참치원양어업에 주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전 세계 참치 어획량의 1/3을 소비하는 일본이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역시 참치 수출국 중 하나였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참치캔은 주로 미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가공을 거친 참치는 미국인의 샌드위치 재료로 사용되었다.

참치캔 수출로 전후복구에 나섰던 일본은 1955년 이후 고도경제성장기를 맞이했다. 기업성장과 근로자의 소득증대는 일본인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소비의 합리화, 표준화는 전전(戰前)에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비혁명에 비해 더욱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었다. '2DK(2 Rooms+Dining/Kitchen)'로 상징되는 공공주택의 보급은 도시화된 생활양식의 표본이었다. 사람들의 입맛도 변화했다. 쌀 소비는 줄고 축산물, 과일류, 맥주 소비가 증가했다. 필수적인 소비를 넘어 선택적인 소비가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식생활의 변화를 일으킨 또 다른 기제는 '냉장고'였다. 1930년대를 전후로 일본에서도 냉장고가 판매되기 시작했지만 가정용 냉장고가 시판된 것은 1950년대 이후였다. 냉장고는 세탁기, 흑백 텔레비전과 함께 현대판 '삼종신기(三種の神器)'로 불리며 가정에서도 신선하게 식품을 '저장'할 수 있는 신기술을 보급했다. 소비자가 식품의 '신선도'에 대해 민감해지기 시작하면서 상품 공급자 역시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제조기술 혁신에 뛰어들었다.

소비생활의 전반적인 고급화와 식생활 내용의 변화, 식품의 신선도에 대한 민감성 증가 같은 생활의 변화들은 참치, 그 중에서도 참치뱃살을 고급 음식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참치초밥은 더 이상 발효나 절임 방식에 의존한 전통적인 형태로 만들어질 필요가 없었다. 참치가 육지로 올라온 이후에도 한동안 붉은 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냉동기술은 가장 유효한 지원자로 기능했다.

국내의 참치 수요량이 증가하면서 기술은 발전의 동기를 끊임없이 제공받았다. 생선의 냉동보존이 필수적인 원양어선의 기술지원을 위해 수산 전문가들이 연구를 거듭한 결과, 1960년대 초 영하 50도의 동결 보관이 가능한 기술이 개발되었다. 초저온 냉동기술의 개발로 일본은 뒤늦게 참치어업에 참여한 한국과 대만보다 품질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날 일본에 가장 많은 참치를 수출하는 한국과 대만은 당시까지만 해도 고성능 선박으로 갈아탄 일본인 업자들의 중고선(船)을 수입해 참치시장에 갓 뛰어든 후발 참여자였다.

취향은 참치도 하늘을 날게 한다.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일본의 원양어선들은 초저온 냉동기술로 참치 생산원가를 증가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와 더불어 고도성장에 따른 물가상승, 국내 참치 수요량의 증가로 인해 1970년대 초 일본의 참치 가격은 10년 전에 비해 약 3.5배나 뛰었다.

그러나 가격 상승은 국내 참치 수요를 끌어내리기에 역부족이었다. 참치의 지속적인 공급이 가격 상승의 상쇄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1976년 수산자원에 대한 주권 보호를 위한 200해리 경제수역 지정에도 어획량은 계속 증가했다. 태평양을 마주한 일본은 근해어업으로 어획고를 오히려 증가시켰으며 증가된 어획량에는 연안국에서 입어료(入漁料)를 구매하여 조업한 생산량도 포함되었다. 1979년의 오일쇼크로 80년대 초에는 참치 어부들의 도산이 꼬리를 이었지만 곧 버블경기와 엔고(円高)로 경제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소비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입 환경이 조성되었다. 신토불이를 쫓는 경향은 일본인 역시 똑같았지만, 수입 참치는 참치 가격을 안정시켜줄 구원투수였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참치가 하늘을 날았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에서 잡힌 참치가 일본의 JAL 항공에 실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화물칸에 설치된 냉장고는 대서양을 떠난 지 나흘이 지난 참치가 여전히 붉은 색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도쿄에는 또 하나의 공항이 문을 열었고 그로부터 다시 5년 후에는 뉴욕 직항편이 개설되었다. 그 결과, 태평양에서 잡힌 보스턴 참다랑어가 싱싱한 상태 그대로 뉴욕과 도쿄를 잇는 하늘을 가로지르게 된다. 나리타 공항(成田空港)은 도쿄, 아니 일본의 새로운 항구였다.

 츠키지(築地) 시장에는 전 세계 바다에서 잡힌 참치가 매일 밤 공수(空輸)된다.
▲ 대만산 참치 츠키지(築地) 시장에는 전 세계 바다에서 잡힌 참치가 매일 밤 공수(空輸)된다.
ⓒ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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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기를 통한 참치 수입은 일본으로 하여금 전 세계의 참치를 먹을 수 있는 활로를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생선(生鮮), 말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참치를 먹을 수 있는 기회도 확대시켰다. 오늘날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에서 잡힌 미나미마구로의 97%가,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잡힌 쿠로마구로의 80% 이상의 참치가 한국, 대만,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수출국을 통해 일본의 식탁에 오른다. 바다를 가로지른 참치가 생물(生物) 그대로 사시미(刺身)나 스시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항공과 냉동기술의 합작 덕분이었다. 수산물 통계에 의하면 1989년 수입 생물참치는 38,572톤, 국내 생물참치는 37,888톤으로, 수입 참치가 국내 생물참치 공급량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일본인들은 현재까지 안정된 가격에 스시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츠키지(築地) 시장의 마구로 도매가격은 90년대 초반 kg당 890엔(円)대를 유지했으나 2000년대 초반에는 700엔대까지 떨어졌다가 2006년 800엔대 초반으로 약간 상승했다. 참치의 급격한 자원 감소로 인해 참치 공급량이 감소한 것을 감안한다면 수요-공급 곡선이 극히 왜곡된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인의 취향 덕에 하늘을 날아본 참치의 별난 경험도, 참치의 입장에서는 호사가 아니라 흉사다.

에도마에즈시부터 냉동기술, 항공수송기술의 개발까지. 참치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일본인들의 애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도쿄 긴자(銀座)의 고급스런 스시 레스토랑에서 먹는 참치 대뱃살은, 일본 전통음식의 가면을 하고 있지만 기실 전통적이지도 일본적이지도 않다. 20세기를 관통하며 다듬어진 날 것에 대한 취향과 바다 혹은 국경을 건너왔을지도 모르는 참치의 정체성은, 신선한 대뱃살에 새겨진 기표와 기의를 한껏 분리시킨다. 이렇게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 "참치 뱃살이야말로 20세기의 발명품!"


태그:#참치, #스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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