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를 이야기하면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를 빼놓을 수 없다. 부모님한테 군대 건강하게 잘 다녀 오겠다는 맹세로 시작해서 조국에 대한 충성맹세부터 상관이나 고참에 대한 복종맹세까지 이어진다.
나는 부동시도 아니고 치료를 위해 이빨을 빼지도 않아 병역의 의무를 필한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이다. 그 덕분에 요즘 같이 유명인들의 병역특혜 의혹이 가득한 대한민국에서 일단 병역 문제에서만큼은 청문회에서도 당당한 입각 자격을 갖추었고 연예인이어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오늘 쓰고자 하는 맹세는 당시 제대하면서 한 맹세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제대하는 동료 모두 도원결의하듯 맹세한 내용이다. 우리뿐 아니라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 후방인 부산에서도 당시에는 똑같은 맹세를 했을 것이다.
그 맹세는 내가 근무한 부대 쪽을 보고는 소변도 누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입대할 때 맹세한 '군인의 길'에 비하면 제대맹세 치고는 좀 우습다. 아마도 혹독한 군생활이 우리에게 그런 맹세를 하게 한 것 같다.
새로 받은 전투화에 발뒤꿈치 다 파여내가 입대하던 1980년대 후반 논산훈련소는 최고의 인기였다. 신병들에게 논산훈련소는 환경이나 훈련강도 면에서 편해 '호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나도 운 좋게 논산훈련소로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신체검사를 받고 이틀 만에 논산역으로 야간이동을 했다. 새로 받은 전투화에 어색한 군복을 입고 역으로 이동하다 보니 발뒤꿈치가 다 까졌다. 요즘 물새는 군화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통증은 상상초월이다.
그리고 도착해 보니 의정부. 거기서 하루 정도를 대기(당시에는 구더기라고 했다)하고 곧장 다음날 00사단이라는 이름만 듣고 버스에 올랐다. 시골길을 돌아 돌아 산중턱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 벌써 선임병들은 오렌지색 운동복을 입고 식당 앞에 줄서 있는데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우리 기수는 약 100여 명, 2주 앞선 선임병이 있었다.
2주 앞서 들어온 선임병, 정말 하늘 같이 부러운 존재다. 우리보다 험한 훈련을 2주 먼저 앞서 받았고 이 지옥(?) 같은 훈련소를 2주 먼저 탈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소수정예부대 훈련 받듯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연병장에서 야간 훈련에 지친 훈련병들에게 10분간 휴식을 주면서도 고향 쪽 별을 바라보고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할 때는 그 씩씩한 군인의 눈망울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노래를 하는지, 곡을 하는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모두 효자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어려운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 받는 날. 우리는 마치 큰 전투를 함께 치른 '전우'들처럼 이등병 계급장을 받고 서로 얼싸안고 눈물의 작별을 했다. 그리고 제대하는 0000년 0월 0일 서울역 앞 시계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결연하게 했다. 모두 건강하게 군 생활하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구타, 얼차려보다 힘든 격리생활... 초코파이 '짜웅'도
삼삼오오 흩어져 각자 배치 받은 부대로 더플백을 메고 갔다. 나도 콤비버스를 타고 다른 동료 예닐곱과 함께 부대로 가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렇게 도착한 군에서 100명 가까운 중대원들과 함께 30개월 가까이 인고의 군생활을 했다.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구타와 얼차려, 호된 유격훈련... 정말 군생활은 쉽지 않았다. 내가 군생활에서 힘들었던 것은 비단 고참들의 구타와 허접한 내무반 생활은 아니었다. 사회와의 고립이었다. 먼 외국에 사는 것도 아닌데 보고 싶은 부모와 친구들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고립감은 유격훈련이나 고참들의 가혹행위보다도 힘들었다.
민간인이 보고 싶어 수혜복구 등 대민지원을 나가기 위해 초코파이 '짜웅'(아부)도 잊지 않았다. 북한군 침입을 감시하는 건지, 야간 순시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의 분위기에서 새벽잠을 깨워 강추위에 보초를 설 때면 동떨어진 현실감에 이 젊은 청춘이 뭐하고 있나하는 회의감도 찾아 들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남아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누르고 누르며 마음을 고쳐 잡고 군생활을 마쳤다. 제대하는 날 사령부에 전역 신고를 하면서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는 앞서한 맹세다. 병역의 의무를 마친 기쁨이 가득할 법한데 우리는 왜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엉뚱한 맹세를 했을까? 30개월 가까운 군 생활에 지친 우리가 할 수 있는 보복(?)이라고는 고작 그것이었다.
다시 입대하는 꿈에 비명... 군인들에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 이유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40세를 넘어선 어느 날. 내가 근무한 군부대를 아내와 함께 찾아 갔다.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일까? 군생활의 추억이 그리웠던 것일까? 아직도 가끔 다시 군에 입대하는 꿈을 꿔 꿈속에서도 발버둥을 치며 "나 다녀왔다"고 소리치다 깨는 나다.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던 그곳을 내 발로 찾아갔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맹세도 속절없이 깨졌다.
요즘 군생활, 잘은 모르지만 사회의 변화처럼 많이 편해지고 환경도 좋아진 것 같다. 그러나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역시 사회와의 단절감은 여전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가다 가끔씩 마주치는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수고한다고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대한민국 남자로서 쉽지 않은 역할을 해주는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덧붙이는 글 | '지키지 못할 맹세 왜 했어 ' 공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