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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역이다. 아침 지하철에 짓눌려 출근하면서 우리는 이 사회의 치열함에 매일 같이 시달리고, 퇴근후 오뎅 국물과 함께 마시는 소주 한 잔에 눈물을 매일 삼킨다.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돌이켜 보면 어린시절부터 그래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줄세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언제나 1등이 있었고, 언제나 반장, 부반장, 임원들과 공부잘하거나 잘사는 아이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 고된 줄서기와 경쟁은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우리의 삶을 달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송은 그나마 가끔 우리가 숨을 돌리며 웃을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것이 바보상자인줄 알면서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기에 기꺼이 휴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방송에서 우리를 채찍질하지 않기를 원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불편한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조금 더 마음을 안식하고 조금 더 행복해지길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방송, 특히 예능에서 바라는 점이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그래서 행복했다. 오랜만에 듣는 깊은 추억이 담긴 음악을 듣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잔재주가 아닌 오랜 삶으로써 뿜어져 나오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경쟁의 포맷이었을지언정 그 음악으로 우리의 삶을 위로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그곳의 모든 가수는 우리에게 영웅이었고, 기쁨이 되어 주었다.

거기까지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거기까지였어야 했다. 우리는 누군가가 떨어져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치열한 일상속에 들어와 잠시 우리를 토닥여준 옛 어머니, 오랜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그자리에서 보고싶어 하지 않았던 불편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치열한 현실, 죽어라 달려도 누군가는 자동차로 지나가버리는 현실, 나는 높이 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데 누군가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버리는 현실, 나는 수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앞에서 누군가가 부정한 방법으로 새치기를 하여 나혼자만 바보가 되어버리는 현실, 우리가 매순간 마주치는 그 불공정한 현실을 온정이란 이름으로 마주치게 만들었다.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은 그곳이다. 우리는 룰을 지키는 세상을 보고싶다. 공정사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지는 그 많은 불공정한 일들을 이제 그만 보고싶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나는 여전히 그자리인데 누군가는 조건이 좋고 상황이 좋고 관계가 좋아 너무도 쉽게 앞서가는 그 모습을 이젠 그만보고 싶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이렇게 힘든데 아무렇지도 않게 '가짜 공정', '가짜 정의', '가짜 질서'를 외치는 그런 세상을 이제 그만 보고싶다. 적어도 감동과 공감이 있어야 할 그 자리, 내가 소파에 누어 편히쉬고 싶은 그 자리 방송에서 만큼은 그만 보고 싶다.

<나는 가수다>는 그 규칙을 어겼다.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이 더러운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내가 잘아는 선배가 떨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이 규칙 따윈 바꿉시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시청자와 평가단의 평가와 약속에 의해 떨어뜨릴 수 있습니까? 그들이 잘못 생각한 거요. 우리가 맞으니 기회를 줍시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들의 룰을 다시 만들었다.

우리는 다시 무시당했다. 우리가 함께 정한 룰은 다시 지켜지지 않았고, 우리가 참여한 평가는 종이조각이 되어버렸다. 다시 새롭게 그들의 룰을 만들었다. 그곳에선 이 가수는 떨어뜨릴 수 없다. 이 음악은 좋으니 다시 들어라. 우리가 결국 다 좋자고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변명과 합리화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 존재가 그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다고 분노한다.


태그:#나는 가수다, #공정, #분노, #나가수, #나는 가수다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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