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관련된 펼침막들이 서울 거리에 여기저기 나붙고 있다. 설마 아니겠지, 주민투표까지는 안 가겠지 하였는데 벌써 이런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누구를 위한 주민투표인가
무엇을 위한 주민투표인가는 알 듯한데, 누구를 위한 투표인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떤 네티즌의 표현을 보니 결국 '오세훈의, 오세훈에 의한, 오세훈을 위한 투표'임을 분명하게 알게 됐다. 정말 그게 아니라면 오세훈 시장은 대선 불출마 선언이라도 하면서 이 제안을 했어야 했다. '나는 대통령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다' 또는 '대통령 욕심이 없다'는 선언이라도 분명히 하고 주민투표를 밀어붙였어야 그나마 구색을 갖추는 것이 아닌가?
"무상 복지 포퓰리즘이 나라의 곳간을 비우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으려..."
"무상 복지는 망국적 포퓰리즘..."
오세훈 시장이 주민 투표에 부치는 이유로 내세운 말들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 '나라'이고 '대한민국'이고 '망국'인가? 오세훈 시장은 지금 '나라' 걱정 때문에 주민 투표를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야릇하다.
만약에 제주도 도지사나 대구의 시장, 부산시장이 이와 같이 해당 교육청과 갈등이 벌어졌을 때도 '나라'를 들먹이겠는가? 아닐 것이다. 제주도나 대구나 부산이라면 도의 예산이나 시의 예산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반대를 했으면 했지, '나라'니 '대한민국'이니 '망국'이니 하는 말을 하면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지랖이 그렇게 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세훈 시장이 꼼수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이래서 분명해진다. 오세훈 시장은 자신을 예비 대통령으로 전제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망국'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을 향하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서울'이 감당할 문제에 '망국'을 얘기하는가? '인류'나 '세계'를 들먹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싶다. 우국충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 진정성을 믿을 건덕지가 없으니 우습지 않은가.
'오세훈의, 오세훈에 의한, 오세훈을 위한 투표'임이 틀림없기에, 이번 투표는 시민의 세금을 가지고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하는 꼴이다. 그러므로 이 주민투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투표다. 그래도 굳이 주민투표를 강행하겠다면 최소한 주민투표에 필요한 비용 180억 원은 마땅히 오세훈 시장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조작된 물음, 물음 속에 숨어 있는 꼼수들
두 개의 선택지를 다시 읽어 보자.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상한 냄새가 난다.
①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② 소득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2011년), 중학교(2012년)에서 전면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왜 이리도 복잡한가? 한참 읽고, 다시 자세히 읽어도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꼼수를 두면서 꼼수가 아닌 척하려니 이렇게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 낯이 간지러운 코미디다.
정말 길고 복잡해도 된다면, 항목 별 내용을 좀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①번 선택지를 다시 읽으면서 묻는다.
①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1) 소득 하위 50% : 어떤 범위를 말하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대한민국 전체인가, 서울 전체인가, 서울의 25개 구 단위인가, 동 단위인가, 단위 학교 단위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단위인가, 중학교 단위인가? 어떤 범위나 단위인가에 따라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 분명히 밝혀야 할 일이다. 또 하나 의문은 그렇게 무 자르듯 50%를 끊을 수 있는 공무원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미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지역에 따라서는 4학년까지 모든 학생이 무상으로 급식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상위 50%는 1학기 동안에 무상으로 먹은 밥값을 토해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래도 되는가?
2) 학생 : 그냥 '학생'이라면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①번으로 결정되었다면 학생의 범위를 어디로 할 것인가? ②번을 읽어야 비로소 ①번의 말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
3) 단계적 : 연도별 단계인가? 초등학교의 단계인가, 중학교의 학년별 단계인가? 예산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니 어떤 단계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마땅하다.
4) 무상 급식 : 궁금하다. 과연 50%만 무상으로 급식을 한다면 그것이 '무상 급식'인가. 지금 중·고등학교에서는 학교에 따라 10% 또는 20% 정도 급식비를 면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10% 무상 급식이고, 20% 무상 급식인가? '무상 급식'이라는 말은 모든 학생이 대상이 될 때나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의무교육'이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듯이. 보편적 복지나 선별적 복지라는 말을 이해가 되지만, '하위 50% 무상 급식'은 '하위 50% 급식비 면제'라는 말로 바꿔야 할 듯하다.
②번을 다시 읽어 본다.
② 소득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2011년), 중학교(2012년)에서 전면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1) 모든 학생 : 모호한 표현이기도 하고 잘못된 표현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모든'을 앞세운 듯하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 대학원생까지 모두 포함된다는 듯한 느낌을 주어 일부러 거부감을 일게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2) 초등학교(2011년) : 2011년 현재 초등학교에서 일부 학년인 3학년까지만 '무상 급식'을 하고 있는데 왜 '2011년'이라는 말을 굳이 써넣었을까?
3) 중학교(2012년) : 이것 역시 굳이 2012년, 바로 내년으로 못박아 그렇게 서두를 건 무언가. 모든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하겠다면 2013년이면 어떻고, 2014년인들 누가 마다 하겠는가? 예산을 참작하여 연차적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예산을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인식을 주어 시민들에게 겁을 주려는 비겁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4) 선택지를 누가 만들었나 : 주민투표를 하여 묻겠다면, 선택지 두 개 중 하나는 마땅히 서울시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 선택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두 선택지를 모두 서울시에서 친절하게 만들었는지 그 속셈이 의심스럽고 가증스럽다.
서울 시민을 모욕하고 낙인 찍다니, 누가 부여한 권리인가?
서울 시민을 '하위 50%'와 '상위 50%'를 극명하게 갈라놓는 일을 누가 할 수 있는가? 자라나는 아이들까지 어찌하여 '하위 50%'와 '상위 50%'로 극명하게 갈라놓을 수 있는가?
아, 누가 감히 이런 폭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감히 이렇게 인간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 시장이라고 해서 서울 시민의 삶에 마음대로 시꺼멓게 색칠해도 되는가?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되는가?
주민투표를 해야 한다느니 거부해야 한다느니, 서울시 전체가 8월 24일까지 생난리를 칠 것이다. '하위 50%, 상위 50%'를 외쳐대면서 '지지 운동'이다, '거부 운동'이다 치열하게 싸움판을 벌일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①번 선택지로 결정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
절반의 시민들에게 '하위 50%'라는 낙인을 확실하게 찍어야 한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주기적으로 그 낙인을 확인시켜야 하리라. 가난하게 사는 것도 서러운데 기까지 꺾고 죽여 놓으면,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학기가 바뀔 때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그 '하위 50%'의 시민들, '하위 부모'들의 가슴 찢어지는 상처는 누가 위로를 할 것인가. 세상의 어느 나라가, 어느 도시가 사람들을 이렇게 극명하게 '상'과 '하'로 갈라놓고, 시정이니 국정이니 하겠는가?
시민들의 입장도 말이 아니겠지만,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마음의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겠는가. 내년에 들어가는 초등학생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최소한 9년을 그런 '하위' 낙인 속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급식비 면제를 은밀히 하고 있는데 '하위 50%'라고 공개적으로 못을 꽉 박아놓았으니 숨을 구멍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받을 깊은 상처, 저 쓰라린 내상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렇게 아이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서라도 오세훈 시장은 '망국'을 내세워 끝까지 주민투표를 해내고야 말겠는가?
오세훈 시장은 '진짜 부모'의 마음을 되찾으시라.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하여 서로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다가, 아이의 고통소리에 진짜 부모는 아이의 팔을 놓지 않았는가? 이 투표가 대대적으로 될수록, 매스컴까지 동원되어 떠들어댈수록, 나이가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어른들의 비겁, 어른들의 폭력을 다 알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겨우 고작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가?
180억 원을 대충 계산해 보니 아이들 밥 500만 그릇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이 180억 원도 물론 아깝지만, 그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제도적으로, 아주 확실하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른이, 어른들이 할 짓이 아니다.
수도(首都) 서울이 참으로 부끄럽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首都)인데, 물난리를 겪고 나서 수도(水都)가 되더니,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주민투표로 부끄러움의 도시 '수도(羞都)'가 되고 있다. 오세훈 시장 한 사람의 쪽을 살리기 위해 1000만 서울 시민들이 얼마나 쪽이 팔리고 있는가? 다른 시도(市道) 사람들이 알까 두렵고, 다른 나라 수도(首都) 사람들이 들을까 조마조마하고 부끄럽다.
무상 급식 문제가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인가? 마치 이게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식으로 위기의식을 증폭시키고 터무니없이 과장을 해야 되겠는가?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제를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라.
결국은 예산이 문제일 텐데 그것이 문제라면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서울시 예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면 가능할 수 있고, 그래도 어려움이 따른다면 점차적으로 완성 연도를 늦추면 되는 것이다.
세계 경제 10위권이라는 나라가 언제까지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밥값을 받을 것인가?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의무 교육인데 밥값을 나라에서 대는 게 뭐 그리 큰 결단이 필요한 문제인가? 다시 말하지만, 너무 서두른다면 속도를 조절하면 될 일이다. 좀 늦더라도 모든 초등학생과 중학교 학생들에게 무상 급식을 하겠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굳이 반대하겠으며, 그 누가 당장 빨리 하자고 억지를 부리겠는가?
오세훈 시장은 '재벌의 자녀에게까지 공짜밥 먹일 수 없다'면서 열을 올리기도 했다. 참으로 그럴 듯하기도 하고, 꽤나 기발하고 자극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재벌 자녀들에게 공짜밥 먹이자는 게 왜 그렇게도 말이 안 되는가? 재벌 자녀들은 그 숫자도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벌들은 해마다 수십억 원 또는 수백억 원의 세금을 내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그런 재벌들에게 고마워서라도 그 자녀의 밥값 좀 안 받아도 되는 것 아닌가? 재벌들의 세금을 엄청나게 깎아 주면서 '공짜밥' 운운하는 것도 사실은 기가 찰 노릇이지만.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0세부터 4세까지 '무상 보육'을 주장하고 있다.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한 주장이다. 이 주장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요 표플리즘이다. 오세훈 시장은 주민투표보다 먼저 한나라당 당사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성을 찾아야 한다. 감정으로, 개인의 욕심으로 이 일을 추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서로 충분히 합의를 하고 대안을 마련할 길이 있는데, 굳이 대화의 창구를 굳게 닫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차마 못 볼 모습이다. 도대체 서울시장을 왜 뽑았고, 서울시 의회를 왜 만들었는가? 서울시 교육청은 또 왜 만들었겠는가? 그런 것쯤은 서로 마음 모아 해결하라고 만들어 준 것 아닌가? 따져보면 뭐 그리 대단한 사안도 아닌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다 망할 듯이 이리 난리를 치게 하고, 서울 시민을 총동원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볼썽사납다.
아이들은 지금 너무 아프다. 사실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이 모자란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의 '학생살이', '학원살이', '학교살이'가 갈수록 고달프다. 아이들이 아픈 곳을 보듬어주어도 모자라는데, 이렇게 설건드려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아이들의 진짜 아픈 곳을 치유하려고 서울 시민들이 이렇게 나서고, 서울시가 이렇게 발벗고 나섰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얼마나 감동적이고 눈물겹겠는가?
오세훈 시장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진짜 망국적 현상은 우리 아이들이 자존감과 자존심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서울 아이들 50%에게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가르친다면 그것이 '망국'의 길 아니고 무엇이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