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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너 그런 식으로 하면 정규직 전환 안 된다."

장미소(25∙여∙가명)씨가 지난해 4월부터 6개월간 한 외국계 홍보대행사의 인턴(수습직원)으로 일하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다. 장씨가 헤드헌터의 소개를 통해 일하게 된 회사는 장씨를 포함한 10명의 인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주었다. 일을 배우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지만 툭 하면 '정규직 전환'을 내세워 위협하는 상사의 언행은 견디기 괴로웠다.

"뭐 어차피 정규직 전환 안 시키면 되니까."
"더 열심히 하면 (정규직 전환) 고려해 볼게."

정규직 되기 위해 잦은 야근도 묵묵히... "인턴 3개월 더 해야겠는데"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좋은 직장을 잡느냐 놓치느냐의 기로에 놓인 장씨와 다른 인턴들은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고객 기업들을 홍보하고, 보도자료를 준비하는 등의 업무를 근무시간인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는 것은 물론 오후 11시까지 이어지는 잦은 야근도 군말 없이 해냈다.

하지만 당초 3개월로 약속됐던 인턴기간이 끝날 무렵 회사는 3개월을 더 연장한다고 통보했다. 장씨가 일하던 도중 사장이 바뀌면서 회사의 인턴제도가 6개월 과정인 정부 주도의 '청년인턴제'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3개월의 고된 생활을 마치고 이제 드디어 정규직이 되나 보다 했던 장씨는 힘이 빠졌지만 다른 도리가 없어 3개월을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막상 6개월이 되자 인턴 10명 중 장씨와 동료 1명만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6개월 동안 야근을 마다 않고 악착 같이 함께 일했던 8명은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장씨도 결국엔 회사를 그만뒀다. 6개월간 겪은 일들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고 회사의 처사에 많이 실망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현재 다른 기업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8명 중 1명만 정규직 채용 후 또 '인턴 모집 공고'

이연희(25∙여∙가명)씨는 지난해 9월 한 기업의 최종면접을 앞두고 있었지만 '2개월 후 정규직 전환'을 약속한 출판사를 선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출판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출근 날 8명의 인턴이 모인 자리에서 상사는 예상치 못했던 말을 했다.

"이 중 몇 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될지 모릅니다. 아무도 안 될 수도 있고, 잘 하면 다 될 수도 있어요."

면접 때는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별 사고 없이 두 달의 인턴을 거치면 당연히 정규직이 되는 것으로 알고 왔기 때문이다. 다른 인턴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종이컵은 맑은 물을 담고 제 일을 찾은 듯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겨진 채 버려진 종이컵은 마음의 상처를 안았다. 다시 맑은 물을 담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지난한 인턴 과정을 겪은 청년 구직자들은 구겨진 일회용 종이컵의 모습과 닮았다.
 종이컵은 맑은 물을 담고 제 일을 찾은 듯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겨진 채 버려진 종이컵은 마음의 상처를 안았다. 다시 맑은 물을 담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지난한 인턴 과정을 겪은 청년 구직자들은 구겨진 일회용 종이컵의 모습과 닮았다. ⓒ 구세라

두 달의 인턴기간 출판사 사람들은 끊임 없이 '너희 하기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이씨 등 인턴 8명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불안해 하며 일에 매달렸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단 한 번도 오후 6시 '정시 퇴근'을 해본 적이 없고 매일 밤 10~11시까지 야근을 했다. 어떤 날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일하다 막차가 끊기기 직전 지하철역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래도 야근 수당은 구경도 못했다. 한달 80만 원 남짓의 인턴 보수가 전부였다. 손이 마비될 정도로 칼질을 했고 복사도 했다. 회사 일과 상관없는 개인 심부름을 시켜도 꾹 참았다. 회사는 야근까지 시키면서도 '하루 4시간 일했다'는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군말 없이 서명했다.

하지만 2개월이 지나자 회사는 8명 중 1명만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이씨를 포함한 7명의 인턴들은 다시 '청년백수'로 돌아갔다. 이씨를 더 화나게 한 것은 그 출판사가 이씨의 인턴만료 일주일 전부터 취업 관련 사이트에 '정규직 전환 인턴 모집 공고'를 또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달간 온갖 일을 시켰던 상사들은 떠나는 인턴들에게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회사가 우리를 일회용품 쓰듯 이용하고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취업 가능성 내세워 혹독한 일 참게 하는 '희망 고문'

 고용노동부는 중소기업 청년인턴제 등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중소기업 청년인턴제 등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 고용노동부

현재 고용노동부에서는 '중소기업 청년취업인턴제' 등을 통해 미취업 청년을 채용하는 기업에 6개월간 약정 임금의 50%(80만 원 한도)를 지원한다. 그런데 일부 기업들은 이 제도를 이용해 비숙련 노동수요를 해결하면서 '정규직 전환 가능성'을 내세워 인턴들이 불합리한 처우를 감내하도록 만들고 있다. 취업 관련 카페 게시판에는 채용 의지도 없으면서 정부 지원제도를 악용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부 기업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회사들로서는 직접 겪어보고 직원을 뽑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턴제도가 유용하지만 구직자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일부 기업의 횡포는 취업준비생들을 두 번 울린다. 특히 대학생 등에게 순수하게 일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의 인턴제도가 아니라 정규직 취업의 한 과정으로 인턴제를 의무화하는 경우 구직자들은 큰 기회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상반기 한 방송사에서 두 달간 인턴을 한 후 최종 선발에서 탈락한 한미희(26∙여∙가명)씨는 "2~3달의 인턴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방송 일은 잡무 정도밖에 없는데 그동안 다른 공채를 준비할 시간을 손해 봤다"고 말했다. 청년구직자들은 기업들이 채용과정에서 사력을 다하는 취업준비생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배려해주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인턴#청년 인턴제#정규직 전환#취업#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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