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마, 씨바."전에는 이 '외침'을 들을 때 통쾌했다. 그러나 4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이희동 시민기자의 주장글
'<나꼼수>에 엄격한 도덕성 잣대...그게 맞아?'를 읽고 나서는 이제 그 '폭언'이 두렵다. 이희동씨는 글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그냥 하던대로 떠들어라. 취사선택은 청취자의 몫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쫄지 마, 씨바."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런 주장이 대표적인 인터넷 진보매체라는 곳에 머릿기사로 올라가 있는 현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막가자는 것인가? 이런 것이 한국 진보의 수준인가?
이희동 기자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 글 제목대로 <나꼼수>는 원래 해적방송이고 스스로도 정체성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대지 말자는 것이다.
둘째, <나꼼수>는 청취자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시민 개개인으로 전제하고 떠들고 싶은대로 떠드는 것이니 알아서 취사선택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듣기 싫으면 듣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 자신의 아내도 그렇게 한단다.
셋째, 그러니 아무리 비판이 쏟아져도 자신의 생각을 '검열'하지 말고 초지일관 하던대로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속 '음담패설'(여성들에게는 성폭력 언어)을 구사하라는 주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자로 크면서 성폭력 가해로부터 면역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아직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남성성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성희롱이라고 비판받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나꼼수> 멤버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사과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이고.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제 갈수록 그 '억울함'을 받아주는 사회의 관용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학을 하든 교육을 받든 하루빨리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는 수밖에 없다.
성희롱 혹은 성폭력이라고 비판받는 행위를 하고 나서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변명하는 사람한테는 그나마 희망이라도 있다. 최소한 성폭력이 나쁜 짓이라는 생각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희동 기자는 <나꼼수>의 문제발언들이 "분명 도를 지나친 성희롱적 발언",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마초이즘의 발현"이라고 판단해놓고 계속 하던대로 떠들어달란다. 무슨 안하무인인가? 이는 성폭력 행위를 해놓고 부인하는 사람보다 더 질이 나쁘다.
'부패' 비판하려는 사람, 자신의 도덕성도 성찰해야이희동 기자의 주장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첫째, <나꼼수>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대지 말라는 주장. <나꼼수>는 해적방송이고 멤버들이 영웅도 아니며 "다만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가카와 그 무리들이 너무 부패했고 무능력하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말 말장난하는 것인가? 대통령이든 누구든 공격하는 상대의 '부패'를 비판하려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도덕성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 정도야 상식 아닌가?
그들의 욕설과 저급한 표현들, 낄낄거림이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것도 그들이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꼼수>가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 힘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믿음과 기대에서 도덕성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말로는 '루저'인 자신들의 얘기가 '소설'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거야 전략적 혹은 재미를 위한 레토릭일 뿐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감취진 진실을 밝히는 미디어 영웅들임을 과시해왔고 그런 대접을 받아왔다. 이는 그들 네 명이 황야의 무법자처럼 한껏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서 있는 포스터 사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영웅일 수 있다는 걸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영웅이다. 다만 이미 영웅이 된 사람들을 자신의 편의에 따라 영웅이 아니라며 감싸는 이희동 기자의 변호가 불쾌한 것 뿐이다.
그들에게 사과 요구가 못마땅하게 들리는 이유야 짐작 못할 게 아니다. 성희롱 정도야, 마초적인 발언 정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 MB정권 타도 같은 '중대한 일'에 비하면 그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까짓 일로 그 중대한 일을 망치려고 하다니 페미니스트들이야말로 정말 눈치코치 없는 골치덩어리들 아닌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오랜 세월 잘못 고착돼온 젠더관계를 바꾸는 일은 일개 정권을 교체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일이다. 적어도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적어도 '진보'를 내세우려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
인간, 주위환경·사회구조 영향 받아... 비판 받아들이는 게 검열?둘째, <나꼼수>는 청취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으므로 문제발언이 나와도 충분히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 <나꼼수>는 청취자들을 권력의 대상물, 계몽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지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소비자를 그렇게 보는 미디어가 어디 있는가? 만약 <조선일보> 독자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표현을 했다면 정말 오만과 독선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진보매체 독자들은 충분히 합리적인 시민이고 조중동이나 종편방송의 독자, 시청자들은 아무 생각없는 무식한 수용자들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는 신문 안 보기 운동을 해야 하고 종편방송 허가를 결사적으로 막아야만 했다는 것인가?
이같은 오만, 독선과 함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희동 기자의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의 단순성이다. 인간은 주위환경, 사회구조와 상관없이 독립적·주체적으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 이미 사회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만약 인간이 그런 존재라면 신문과 방송 인터넷을 다 '꼴보수'가 장악해도 합리적인 시민교육만 잘하면 된다. 뭐하러 방송의 공정성·독립성을 얘기하고 미디어 운동을 하는가? <나꼼수>는 왜 필요한가? <나꼼수>가 아니라도 MB정권이 교체돼야 할 정권이라는 것 정도는 '합리적 판단'을 하는 시민들은 대체로 잘 알고 있다.
이번 <나꼼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사건 역시 <나꼼수> 멤버 개인들의 문제라기보다 <나꼼수> 구조의 문제로 보자는 것이다. 출연자 전원이 남성이므로 바로 남성중심 구조가 형성되는데 컨셉마저 '골방 속 낄낄거림'이니 자라면서 체화된 잘못된 남성성 혹은 젠더관계가 거리낌 없이 노골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골방 속에서 넘쳐난 테스토스테론은 몸에 붙은 아비투스(일정하게 구조화된 개인의 성향체계)를 통해 주진우 기자의 '누나' 운운처럼 여성들을 주로 성적인 맥락에서 등장시켰다. 애초부터 성희롱·성폭력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때문에 적지 않은 여성들이 <나꼼수>를 좋아하면서도 불편해했다. 이희동 기자의 부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희동 기자의 처방이라니! "그녀는 나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걸러 듣는다"고 한다. 이야기 전달에는 전달자의 관점도 포함된다. 둘은 떼놓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아내는 <나꼼수>를 듣는 게 아니라 <나꼼수>가 하는 얘기를 남편의 눈으로 가공한 것을 듣는 것이다. 여기서 여자는 남편 따라 투표해야 한다던 과거의 주장이 떠오르지 않는가? 듣기 거북하면 남편을 통해 들으면 된다! 참으로 일석이조의 해법이다. 성희롱도 계속하고 아내도 조종하고.
셋째, 자신의 생각을 '검열'하지 말고 초지일관 하던대로 하라는 주장. 비판을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게 검열인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과 다른 집단의 '합리적인' 비판들을 '쫄지 않고' 무시하며 막 나가는 게 '자유로운 의사표현'인가? 세상에 절대적인 자유는 없다. 모든 자유는 관계 속의 자유고 맥락 속의 자유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쓸까 말까 하다 마지막으로 붙인다. 사과에 관한 한 가카가 <나꼼수>나 이희동 기자 같은 부류들보다 나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