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는 늘 공부하지 말란 소리만했지, 저는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어릴 때 숙제한다고 방에 앉아 있으면 아버님이 작대기로 기둥을 치면서 "공부한다고 돈이 생기나, 밥이 생기나" 하시며 소 먹일 풀이나 베러 가라고 했고, 밤에도 책을 보고 있으면 호롱불 기름 많이 닳는다고 불 끄라고 하셨죠.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부모님이 귀에 닳도록 말씀하시던 "우리 학창 시절에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잔소리의 그 구조적 시대상의 실체를. 그리고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시대의 부모들은. 우리 부모님이 공부를 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공부를 통해서 성공한 당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법륜스님의 부모님 세대는 그런 경험이 전무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단순히 "잔소리를 안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고 있으면 혼냈다는 것이다. 공부가 장기적으로 어떤 효용을 가져올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거니와 설령 인지했더라도 미래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자식을 공부시킬 여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먹고 살기 바쁜데 어떻게 통일에 대해서 생각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들과 비슷한 처지 아닐까? 이렇게 사회 양극화가 심하고 사회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과연 먼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하지만 법륜스님의 새로운 100년을 읽고 취지에 공감한다면 자신의 삶이 희생당하지 않는 한에서 통일을 위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다.
법륜스님은 <새로운 100년>에서 다각도에 걸쳐 통일을 해야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파한다. 이 책을 읽고 통일을 해야하는 한 가지 이유를 손 꼽으라면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의 자주성의 회복이라고 하겠다. 나는 중학교때 한국 근대소설을 읽는 것이 제일 싫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이범선의 <오발탄> 등 사실주의라고 불리우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소설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너무 우울했다.
국난의 시대에 어렵게 살아갔던 사람들은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오는 정의로운 사회에도 살지 못했고, 더더욱 창의력을 발휘해서 예술가가 되기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하는 "마이클 조던이 부자가 된 것은 공을 바구니 안에 넣는 것을 보상하는 사회 구조 덕이기 때문에 사회 복지의 의무를 지닌다"는 식의 담론도 접해보지 못했다.
그 시대의 인간 군상들은 근 100년의 긴 세월동안 자신에 대한 자조와 외세를 향한 열등의식을 체화하며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이 기나긴 패배의 기억은 150년간의 근현대사에서 누적되었던 상처라고 법륜스님은 말한다. 그리고 베트남은 미국에게, 프랑스는 독일에게 떳떳한 것처럼 통일을 이루는 것은 우리에게 계속 지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고 한다.
하지만 법륜스님은 이런 이유 뿐만 아니라, 더욱더 '미래지향적인 통일을' 구상하고,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승리의 경험이 독립과 민주화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제적인 성장도 한단계 도약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통일에서 멈추지 않고 동북아 경제 공동체 건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통일 한국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륜스님은 이런 이상향을 위해서 '사소취대'하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하여 과거 100년간의 독립운동을 평가하고, 북한의 3대 세습이나 인권문제, 그리고 한미 전작권 반환 같은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내린다.
또한,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북한과 소통해야 한다면 남한의 친일파 후손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그들의 통일에 관한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앞으로 통일을 위해서는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같은 법륜스님의 태도가 지극히 "실용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용"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이해타산적이고, 목적을 위해 명분따위를 따지지 않는 가벼움이 아닌, 명확한 역사의식에 기인한 보다 전향적인 그의 신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여지는 법륜이라는 인간의 모습은, 정말 냉철하다. 단순히 입으로만 통일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향의 실현가능성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고뇌하고 실천하는 이 법륜스님의 자세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여느 자기계발서보다 자아 성찰적이며, 100년 앞을 내다보자는 그의 말은 여느 실존주의 철학자의 말보다 희망적이다.
그가 예로 드는 역사적 실패의 반면교사, 그리고 중국이 대만에게 보여주는 포용력, 과거 도덕적이었던 북한정권의 몰락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번쯤은 곱씹어보아야 할 내용들이다.
책에서 느낀 한가지 한계점이 있다면 그가 현안을 다루는 모습은 자못 명쾌하다고 할 수 있으나, 다소 "원론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북핵문제에 대한 의견은 구구절절히 옳은 말이지만 입이 있다면 누가 바른말을 못할까? 자신의 체제 존립을 위해서 목숨걸고 있는 그들에게 '죄수의 딜레마'같은 경우처럼 어려운 상황인데. 과연 이같은 원론적인 접근이 현실적으로 유용할 것인가.
하지만 법륜스님이 20년간 일관되게 진행해왔던 활동의 진실성이나, 아까 언급했던대로, 법륜의 냉철한 판단력에 빗대 볼 때 현실성의 부족이라는 나의 비판은 오히려 . 나도 여느 사람처럼 원하는 모든 바가 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철 없는 마음이 있다. 이렇게 원대한 일이 과연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것이 옳은 것일까? 지난 5년간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시민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자신 한 표의 투표권 행사가 얼마나 많은 개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하물며 법륜스님이 20년동안 고뇌해서 제공한 이 구체적인 청사진이 그렇게 쉽게 달성될 수 있다는 기대가 오히려 더 비현실 적인것은 아닐까.
자신이 '품성론'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법륜스님은 수행을 소비주의적 문명의 대안적인 요소로 평가한다. 환경문제, 자원 고갈문제, 양극화 문제 해소를 위한 복지사회 구축과 같은 구조적인 변화와 함께 우리 개개인 속에 내재되어있는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론으로서 수행을 강조한다. 법륜스님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데 왜 바쁘냐"라는 질문에 출가를 한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린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나. 품성론이라고 일컬어지는 법륜스님의 수행강조는 여느 이데올로기처럼 고착화 된 이론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그를 기반으로 한 목적의식적 행위를 할 경우나, 수행은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라는 것일 뿐이다.
"가슴을 뛰게하는 통일 이야기"라는 부제를 지닌 법륜스님의 "새로운 100년"은 단순히 거시적인 관점에서 통일에 대한 담론을 설파할 뿐 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가지 단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필독서이다.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100년"은 희망적이다. 과거 독립운동의 비타협성과 결벽성을 경계하여, 누구나 가능한 만큼만 도우라고 한다. 작게는 투표만 잘 해도 된다고.
어느 대구에 사는 시민은 매주 점심 한 끼를 굶으며 이 책을 국회의원 300명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살만하다는 아닌가? 법륜스님은 말한다. 이 정도로 과제가 커야지 할 맛이 나지 않겠느냐고, 부담갖지 말고 한 번 같이 해보자고.내 가슴은 뛰고있다. 먼 미래에 대학생쯤 된 내 아들이 '내일로'를 통해서 신의주를 거쳐서 두만강에 발도 담궈보고, 몽골의 드넓은 초원에서 누워서 담배도 피워보고 모스크바에서 아리따운 러시아 아가씨들과 사랑도 해보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런 세상이 오지 않는 한 나는 결코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새로운 100년 이벤트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