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광해>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주인공인 이병헌은 영화 속 주요 모티브로 사용된 단팥죽을 관객들에게 선물했고, 유명 외식 업체는 '광해 세트'라는 이름을 붙인 궁중음식을 새로운 메뉴로 내놓고 있다.
특히 '나눔과 베풂'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 영화 속 음식들은 밥그릇 싸움에 혈안이 된 무능한 관리들의 작태를 은근히 비꼬기 위한 매개물로 사용된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인이 갖춰야 할 최고의 현실적 답이라는 것.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군주에 대한 지극한 갈망을 영화는 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좀 덜먹으면 수많은 백성들이 굶지 않아도 된다는 간단한 논리를 몸소 실천하는 군주. 그런 영웅을 갈망하는 백성들과 그들의 조건 없는 충정은 역사에도 없는 픽션일 뿐인 데도 강한 공감을 만들어낸다. 나라 살림을 엉망으로 사는 본래 임금을 잠시 밀쳐두고 '너 따위 말고! 정말 이런 사람 하나 나왔으면 우리도 살 맛 나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 시절 민초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졌을지도 모를 꿈을 살짝 엿보는 기분은 그래서 유쾌하고 한편으론 지금 현재와 대비돼 씁쓸하다.
영화 속에서 얼결에 왕 노릇을 하게 된 광대는 정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원치 않게 군주라는 허상을 쓰게 됐다. 하지만 천성 덕분에 서민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백성들 마음속에 급속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는 현대에서 흔히 말해지는'이미지 정치'란 것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았기에 백성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굳이 백성들 턱 밑에서 애달아하며 '광대 노릇'을 할 필요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정치인들 스스로가 포장지로 곱게 싼 자신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내보이려 애쓰는 현실과도 매우 대조적이다.
그들은 예능 프로그램 안에서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면서 평범한 이웃인 듯이 보이려 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유행 춤을 추면서 정체된 이미지를 깨려 애쓰며, 지난 시절 사진을 놓고 삶의 궤적을 눈물겹게 이야기하는 동안 '복지국가 건설' '사회 정의 실현' '함께 잘 사는 사회' 같은, 어느 시절에나 있어왔던 수많은 공약들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대중들이 자신을 떠올릴 때면 얼른 연상되는 사물이나 감상만이 그 자리에 남아서, 그 이미지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대신해 주길 바라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미지. 여기서 '이미지'라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란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불어서 각 후보가 현실에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거짓된 모습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가면의 얼굴을 믿고 싶어하고, 때론 그 허상 안에서 행복한 기대감을 갖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전략은 때로는 극적인 공감을 얻어서 '신드롬'이나 '현상'이란 단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 단어가 해당 정치인에 대해 우리 사회가 거는 직접적인 지표처럼 받아들여져서 온 사회가 그를 신격화 하는 상황에도 이른다. 하지만 그의 신념을 어필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를 떠올릴 때 즉각 연상되는, 감성에 호소한 한 표를 받아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장치에 국민 스스로가 발목을 잡혔단 것을 눈치 챌 때쯤이면 이미 시간은 너무 지나가버린 뒤가 된다. 그러기에 '이미지 정치'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절대 수동적이어선 안 될 것 같다.
자, 여기에 하나의 궁궐이 있다 치자. 신하들은 당파가 분리돼 저들끼리 욕이나 하고, 치고받고 싸우고, 한편으론 임금을 모략할 기회를 엿보는 가운데 백성들이 상소문이라도 올릴라 치면 저들이 마치 임금인양 위세떨기에 바쁘다. 임금의 밤일을 모시며 일보 승천하고 싶은 궁녀들은 세자를 임신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붙들어야겠다며 경쟁적으로 안달이 나 있고, 여자 사냥에만 혈안이 된 임금은 온갖 추잡한 성적 만행으로 궁궐을 아방궁으로 만드느라 나랏일을 뒷전으로 하고 있다.
이 틈에 나라 살림은 엉망이 되고 민심은 흉흉해지며, 충언을 해봐야 미움만 산단 것을 아는 간신배들은 옳다구나 이 김에 제 몫이나 챙기자며 온갖 모략을 일삼을 뿐이다. 궐 밖의 이들은 '저 정신 나간 자들을 응징하자'며 민란 봉기를 외친다고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되질 않는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분노의 민심만으로 그들을 깨우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건 말건 모른 척 내버려두어야 하나? 아니다. 차라리 역설적으로 칭찬을 퍼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허상 하나를 덧씌워서 그들이 특별하고 완전한 인물인 듯이 재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의식이 있는 자라면 그 허상의 본질을 얼른 깨닫고 자신의 과오를 되돌리고자 노력할 수도 있다. 반면에 무지한 자라면 이를 진짜인 양 착각하고 오히려 오만함이 하늘 끝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어떻건 승산은 반반이다. 손가락질하며 흉을 보느니 차라리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가면을 하나 덧씌워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게 나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한 '광대'가 돼 민심을 얻길 갈망하는 것, 그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것을 적극적인 '이미지 정치', 백성이 주체가 되어 군주를 가르치는 정치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