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벽, 2013년 예산이 국회에서 확정되었다. '박근혜표 복지예산'이라고도 불린다. 언론마다 복지예산 100조 원 시대를 강조한다. 보수진영 일부에서 복지 포퓰리즘이라 비판하고, 청와대와 국방비는 국방예산 삭감에 분통을 터뜨린다. 보수 내부의 반발은 박근혜표 예산이 전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반증일까? 올해 예산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무엇일까?
보수 진영 일부에서 제기하는 비판이 복지 포퓰리즘이다.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예산이 증액되었고, 그 결과 복지예산이 100조 원, 정부지출 대비 비중이 30%에 이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말 이 수치가 그렇게도 대단한 것인가?
올해 복지분야 지출은 97.4조 원이다(일부 민간위탁 복지를 포함하면 100조 원이라는 정부 해석). 애초 이명박정부가 제출한 원안 97.1조 원에서 3천억 원 증가한 규모이다. 작년 92.6조 원에 비하면 4.8조 원, 5.2% 늘었다. 올해 정부 총지출 평균 증가율 5.1%보다 0.1% 포인트 높을 뿐이다. 100조라는 상징성 외에 증가 금액에서든 증가 속도에서든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복지분야 97.4조 원이 전체 정부 총지출 342조 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8.5%이다. 작년에도 복지지출 비중이 28.5%였다. 애초 이명박 정부안대로 통과되었으면 28.4%로 낮아질 뻔했는데 다행히 일부 증액돼 작년 수준인 28.5%를 유지하게 되었다. 30%에 육박하긴 하다. 30%가 어떤 상징성을 지닌 기준인지는 모르겠으나 작년과 동일한 비중이므로 굳이 생색낼 것은 아니다.
어쨌든 100조 원, 30%에 육박한다. 이 수치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제 대한민국이 복지국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상징인가? 혹은 복지 포푤리즘을 보여주는 증표인가? 만약 박근혜 당선인이 국제 정상회의에 참석해 자신이 '100조 원, 30% 시대'를 열었다고 연설했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나라 정상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멕시코 대통령의 입가에 미소가 흐를 듯하다. 멕시코가 꼴찌인 줄 알았는데 더 아래 나라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가입한 OECD 국가들 대부분은 재정의 절반을 복지에 쓴다. 멕시코도 정부지출의 35%를 복지에 사용하니 아직도 30%대에 이르지 못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100조 원, 30%! 이는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다.
복지예산 증가가 2.4조 원인 이유...복지예산 증액과 동시에 벌어진 예산 삭감 도대체 정부안에 비해 복지지출이 얼마나 늘었다고 이토록 난리일까? 복지분야 지출은 3천억 원 더 늘었을 뿐이다. 그런데 박근혜표 복지예산 증가액이 2.4조 원이라고 한다. 무슨 이유일까?
우리나라와 국제기구 모두 재정분야 지출을 따질 때 복지와 교육을 구분해 계산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증액된 반값등록금 예산은 복지분야가 아니라 교육 분야로 계산된다. 그래도 재정분류체계에서 복지 분야로 간주되지 않지만, 일반적 상식에서 보면 교육도 중요한 복지임에 틀림이 없다. 이번 2.4조 원에 포함된 교육분야의 반값등록금 예산, 농업분야의 쌀 고정직불금, 국방분야의 사병월급 인상 등이 그렇다. 이 사업들은 지난 대선에서 여야후보 모두 내걸었던 공약들이다. 용어 혼선을 피하려면 복지예산보다는 '민생예산'이라고 칭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민생예산이 2.4조 원 늘었다. 긍정적인 일이다. 그런데 깎인 예산도 있다. 대표적으로 보건복지부 소관에서만 16개 사업, 총 6404억 원이 삭감되었다. 가장 상징적 삭감은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일부 차상위계층을 위한 의료급여 정부 지원금 2824억 원이다. 이는 정부가 의료기관에 미지급한 금액을 갚기 위한 예산이었는데, 이번 삭감으로 의료기관은 취약계층 진료를 더욱 꺼리게 되고 당사자들은 병원 이용에 눈치를 더 보게 되었다.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정부지원금 3389억 원도 삭감되었다. 이 정부지원금은 가입자와 기업이 내는 보험료 총액에 연동되어 있는데(보험료 예상수입의 14%), 애초 예상했던 4.5% 인상률이 1.6%로 그치면서 정부지원금도 줄어들게 되었다. 사실 이는 국회의 책임이기보다는 작년 10월 가입자, 의료공급자, 공익위원들이 참여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 결정에 따른 결과이다. 가입자들이 평균 월 1만 원씩 더 내고 이를 지렛대로 기업, 정부 몫을 키워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병원비를 해결하자는 운동이 왜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예산 삭감이다.
교육 분야에 속하지만, 학교 비정규직 호봉제 예산 808억 원도 사라졌다. 11만 명의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월 5만 원 가량의 호봉 인상(9급 공무원 1호봉 수준)을 적용하려는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다수 급식, 돌봄, 도서관 사서, 특수교육, 학교행정 등을 담당하면서 심각한 저임금에 시달려 왔다. 다행히 작년부터 학교비정규직 처우 개선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받게 되자 이번 예산안 심사에서 국회 교육과학위원회도 호봉제 도입 예산 증액을 여야합의로 정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겼었다. 그런데 막판 박근혜표 예산, 쪽지예산 공방 과정에서 유탄을 맞은 것이다.
민생예산 순증액 1.7조 원에 불과... 복지 때문에 국방비가 깎였다고?
정리하면 의료급여 예산, 국민건강보험 정부보조금, 학교비정규직 호봉예산 등 민생예산에서 삭감된 금액이 총 7천억 원이 넘는다. 박근혜표 민생예산 순증가액은, 2.4조 원 증액과 0.7조 원 삭감을 모두 감안하면 최종적으로 1.7조 원이다.
올해 정부총지출 금액이 342조 원이다.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을 반영하느라 증가된 금액은 1.7조 원, 정부총지출의 0.5%에 불과하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 증액이 아니다. 오히려 지난 대선과정에서 확인된 복지민심과 후보들의 복지 확대 약속에 비하면 턱없이 빈약한 증액이다.
최근 OECD가 발표한 복지재정 수치를 보면 2012년 한국의 복지 규모는 GDP 9.3%이다. 반면 OECD 평균은 21.7%로 우리보다 무려 12.4% 포인트 높다. 이 차이를 돈으로 계산하면, 작년 우리나라 GDP가 약 1300조 원이므로 160조 원이다. 프랑스(32.1%), 스웨덴(28.2%)도 아니고 OECD 평균(21.7%)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무려 복지예산을 연 160조 원 늘려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 1.7조 원 증액을 두고 이토록 법석을 떨고 있다.
이 1.7조 원 증액 때문에 국가 안보가 경시되었다고 난리를 치는 세력이 있다. 청와대와 국방부이다. 도대체 국방예산이 얼마나 깎였을까?
애초 정부안에서 2898억 원 줄었다. 전체 국방예산 34.3조 원의 1%도 안되는 금액이다. 의료급여 단일사업에서 날아간 2824억 원과 거의 같은 금액이다. 이 삭감에도 올해 국방예산은 작년 32조 9576억 원에서 34조 3453억 원으로 1조 3877억 원, 4.2% 증가했다.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 증가율 2.7%, 농림/수산/식품 분야 1.4%, 일반공공행정 1.2%보다 높은 증가세다.
삭감 규모도 미미한 수준이지만 중요한 건 삭감 이유이다. 차기 전투기사업(1300억 원), 대형 공격헬기 사업(500억 원)은 작년 계약 체결이 지연됨에 따라 감액되었고, K-2 전차 사업(567억 원) 등은 사업추진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사업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사업이 지연됨에 따라 올해 지출되지 않고 불용이 예상돼 조정한 것뿐이다.
결국 이번 일부 국방예산 감액은 애초 예산편성이 부실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복지지출이 늘든 줄든 이와 관계없이 손봤어야 하는 예산이다. 그런데도 국방부, 보수언론은 자신의 과대 예산편성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복지 때문에 깎였다, 국가 안보를 경시한다'는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후보시절 '빚내지 않겠다', 당선 후 '국채 발행하자'
이번 박근혜표 예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대부분 언론에서 복지 확대를 강조하는데, 고작 1.7조 원에 불과하다. 복지를 늘리려는 상징적 조치라는 점에서 전향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대신 '복지지출 100조 원, 재정 대비 30%' 문구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는 인지해야 한다.
이번 박근혜표 예산에서 진정 주목해야 할 점은 박근혜 당선인의 복지재정 조달 방식이다. 애초 박근혜 당선인은 절대 빚내지 않고 복지를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기존 재정지출을 개혁하고, 세금감면을 손보고, 과세체계 틈새를 보완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당선된 직후부터 당선인과 원내대표가 내놓은 방안이 국채 발행이었다(여론과 야당의 반발로 철회되었지만). 복지확충을 위해 다른 사업 축소가 필요하다면 왜 공약대로 기존 재정 지출를 손보거나 세금감면 축소에 강력히 나서지 않는가? 오히려 막판 실세들의 지역 토건예산 쪽지가 난무하면서 SOC 분야는 4천억 원이나 증액되었다.
'공약 사기(詐欺)'를 사주하는 세력들 과연 박근혜 당선인이 자신의 재정조달 방안으로 복지공약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박근혜/문재인 대선후보 복지·재정공약 평가" 제목의 이슈페이퍼(
http://mywelfare.or.kr/160)를 통해 박 당선인의 재정조달공약의 빈약함을 지적한 바 있다. 예산 절감, 세출구조조정, 세제개편 등이 제시되지만 구체적 내역이 없어 실효성이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예산에서는 국채 금리를 하향 전망해 이자지출을 1.4조 원을 낮게 설정하고 예비비에서 0.6조 원을 빼내는 등 재정구조 개혁과 무관한 조치들로 겨우 세입과 세출을 맞추었다. 그런데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에 의하면 임기 후반부 복지확충 규모는 지금보다 연 30조 원이 늘어나야 한다. 고작 1.7조 원 복지증가를 가지고 이 논란을 벌이는데, 30조 원 복지 확충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당연히 재정지출 개혁, 탈루소득 과세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아직도 손봐야 할 재정지출 틈새가 많다. 하지만 이 작업들로만 복지재정을 조달하기 어렵다. 당선인의 강조한 지하경제 양성화도 반세기 뿌리박아온 사회경제구조를 고치는 일이라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도 미지수인 과제이다.
그런데 복지공약은 5년 임기 내에 지켜야할 약속이다. 어느새 새누리당과 보수언론 내부에서 애초 지킬 수 없는 복지공약이었다며 전면 재검토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공약을 지키지 말자는 '공약 사기(詐欺)'를 사주하니 어이가 없다.
단호하게 재정지출 개혁, 증세에 나서라 박근혜 당선인은 신뢰를 생명으로 여긴다고 매번 강조한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의 눈으로 보면 보편복지 철학과 정책에는 못 미치는 복지공약이지만, 그 약속이라도 지키려면 복지재정 확충에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선 단호하게 재정지출 개혁을 벌여야 한다.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조치는 이번 쪽지예산 당사자들에게 엄중한 경고와 정치적 불이익을 주는 일이다. 토목세력과 단절하는 획기적인 재정지출 개혁안을 인수위에게 주문해야 한다.
동시에 복지민심을 충족하려면 복지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낮은 조세부담률로는 심화되는 고령화, 커가는 복지민심을 대응할 수 없다. 국민과 함께 '증세' 논의를 시작해라.
덧붙이는 글 | 오건호 기자는 <내가만드는복지국가>공동운영위원장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