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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나는 거의 아무 계획 없이 아침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습습한 더위가 반겨주는 방콕에 도착해서 여행자의 성지라 불리는 카오산 로드에 짐을 풀었다. 어쩌면 부산보다 더욱 화려했던 방콕에서 나는 더 숨이 막힐 듯한 현기증에 시달렸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본 설명도 없는 작은 섬을 향해서 다시 짐을 꾸렸다. 방콕에서 기차로 13시간 다시 버스로 1시간 다시 배로 1시간 정도를 거쳐 지칠 때로 지친 나는 아주 작은 꼬리페 섬에 도착했다.

2주 정도 섬에서 지내면서 매일 낮잠을 자고, 수영하고, 모래를 쌓고, 책을 읽고, 사람을 구경하고, 거기서 만난 요리사 주아의 요리를 얻어먹고, 각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했다.(꼭 낭만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당연시 여겼던 나의 개미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놀이의 달인이 되고 싶어 노력하는 아마추어 베짱이이다.

'노동하는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의 희생양 바로 '당신'

우리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명제 아래에 베짱이는 쓸모없는(無用) 존재로 여기면서 개미처럼 성실히 살아가야 하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루덴스>는 실은 베짱이의 삶이 우리의 삶이었다고 말해준다.

산업사회 이전의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노동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축제를 열며 친구들과 노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 이상의 노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사회 속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지주나 귀족, 봉건 영주들은 일명 울타리 치기 법인 '인클로저'와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 죽음을 명하는 '피의 입법'으로 베짱이들의 축제와 공동체 놀이를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그들을 성실한 개미로 만들어 버렸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시계는 흔히 보기 힘든 사치품이었지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모두가 시계를 보고 시간을 체크하는 삶, 시간표를 좇아가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본문 p42)

지금 우리에게 '인클로저'와 '피의 입법'은 없어졌지만 왜 다시 베짱이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 중독'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 '노동 중독'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세상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해야 할 일을 한 다음에 놀아. 좀 힘들고 지루해도 열심히 공부(노동)하면 나중엔 훨씬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이렇게 우리의 삶은 미래에 대한 공포가 현재를 지배당하고 있다. 과연 이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일요일에 축 늘어져 쉬고 있는 아빠는 재가동을 위해 충전하고 있는 건전지 같다. 오직 내일의 노동을 위한 휴식이라면 그건 이미 노동의 일부가 아닐까? (본문 p59)

나도 아르바이트의 목적은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내 친구는 아르바이트하는 모든 목적은 놀기 위함이라는 명언(?)을 던져주었다. 즉 노동하는 인간의 놀이란 돈을 쓰는 소비의 놀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런 소비의 놀이, 아주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놀이는 놀이라 부를 수 있는가?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결코 놀이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노동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노동의 그림자가 아닌 나의 삶을 싱그러운 즐거움으로 채우는 놀이는 무엇일까? 또 그게 가능한 것일까?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세계 엿보기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놀이와 노동하는 인간의 놀이를 각각 대표하는 만화가 있다. 바로 <마법진 구루구루>와 <오즈의 마법사>이다.

전자는 용사님과 한 마법사 소녀가 대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서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여러 사건을 겪는 이야기다. 온갖 괴물들과 싸우고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대마왕의 성에 다다른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대마왕의 성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며 만화는 끝이 난다.

그렇다. 아이들은 대마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가장 즐거운 놀이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놀이는 '대마왕 무찌르기'라는 목적에 의해서 지속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놀이에 예정된 도착지 따위는 없다. 그러나 그 반면 노동하는 인간의 놀이를 대표하는 <오즈의 마법사>는 도로시와 사자, 나무꾼과 허수아비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무의미하며 그저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어떤 목적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과정을 무구하게 즐기는 놀이. 이것이 진정한 놀이라고.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중독과 놀이의 차이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를 두고서 과연 그가 술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술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라, 술에 장악되어 있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본문 p83)

그렇다. 진정한 놀이란 언제라도 그것을 그만둘 수 있을 때, 바로 내가 놀이의 주인일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놀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제 '당신'의 차례!

이런 놀이가 우리의 삶에서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의 아주 큰 오산이다. 4가지의 각각 'stage'를 밟으면서 아주 신명 나는 놀이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꿈틀꿈틀 존재하기 때문이다.

stage 1. 노동과 소유의 욕망에서 탈주하기
카피라이트(저작권)에 대항하는 카피레프트 운동은 최초의 해커 중 한 명인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한 세상을 바꾸는 놀이이다. 권리를 뜻하는 right를 말장난처럼 left로 슬쩍 바꾼 이름의 이 운동은 '내 것'을 '우리 것'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였다. 정보를 독점하고 팔아서 이윤을 남기려는 자본주의 규칙의 틈새를 파고든 싸움은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이익'이 아닌 '즐거움'으로 변하는 세상을 바꾸는 놀이었다.

stage 2. 놀기, 온몸으로 세상을 바꾸기
1960년대. 미국에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히피(Hippie)라고 불린 이들은 자본주의, 전쟁,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여 1967년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 또는 '우드스탁 페스티벌' 등으로 상업주의 축제를 다 벗어던지고 너와 나가 우리라는 하나됨을 즐기는 진정한 '축제'를 만든다.

stage 3. 놀기! 시장에서 질주하기
홍대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표현하면 만들어낸 가장 적극적인 놀이의 장인 프리마켓이 있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팔고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서로의 '끼'(?)를 표출하고,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한데 섞이면서 시장의 규칙을 헝클어뜨리며 노는 축제의 장이다.

stage 4. 교실에서 놀기, 세상에서 배우기
'학교'(school)의 어원이 '여가'(skhole) 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문학은 노래였으며, 철학은 지혜를 겨루는 수수께끼였고, 과학은 마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합리'와 '객관'이라는 이름의 칼날이 마법을 과학에서 쫓아낸다. (본문 p187)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몸 전체로 호흡하며 놀이하는 학문은 외어야 하는, 쓸모를 위한 도구가 된 노동이 되어버렸다!! (오호통재라)

하지만 지금의 공부(노동)도 우리가 학교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우고 공부와 놀이의 경계를 지울 때 진정한 공부(놀이)로 변화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마법진 구루구루>를 정말 즐겨봤던 기억이 난다.

나도 구루구루 주인공들처럼 서툴지만 목적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과정을 무구하게 즐기는 놀이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일단 시작하자! 놀기 시작만 한다면 더 잘 놀게 될 테니깐.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 이제 베짱이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한경애 지음, 그린비(2007)


#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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