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나 관악산 입구 같은 데를 보면 '납북자 신고 받습니다'라는 정부 산하기관의 유인물이 붙어있어요. 그 안에 하얗게 이를 보이며 웃는 아주머니 사진을 볼 때마다 '어찌 똑같은 세금을 내는 국민을 이렇게 차별하는지' 어금니를 깨물게 되더군요. 우리 유족들은 유골 발굴해 달라고 정부에 아무리 요청해도 예산이 없고 관련법이 없다고 들어 주지도 않는데…."'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대외협력위원장 박용현(67)씨가 울분을 터트렸다.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보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에 휩쓸려 학살됐다고 한다. 당시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한때 '좌익'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전쟁 상황에서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군과 경찰이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한 참극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통제하고 회유하기 위해 정부가 1949년 10월 만든 조직인데, 사상범 출신이 주 대상이었지만 지역별 할당을 채우기 위해 주민을 임의가입시킨 경우도 있어 그해 말 인원이 3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정확한 희생자 숫자는 알 길이 없다.
4·19 직후 유해발굴 시도... 5·16으로 중단
지난 24일 오후 4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포럼 진실과 정의'가 주최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골문제' 토론회에 박씨를 포함한 유족과 전문가 등 20여 명이 모였다. 한국전쟁 발발 63년. 그동안 나라를 지키다 숨진 국군의 유해발굴이나 추모사업 등은 꾸준히 진행됐지만,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곳곳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만들어지고 경상도를 중심으로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됐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다시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유족회 간부들을 구속하고, 신원조회를 통해 유족들의 해외유학·공직 진출 등을 막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억압의 수단으로 반공(反共)주의를 적극 활용하던 시대였다.
유족회가 다시 결성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미군에 학살당한 '노근리사건'이 외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1999년이었다. 이때부터 전쟁 당시의 다양한 민간인 학살사건이 활발하게 보도됐고, 유가족들은 시민단체와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과거청산'을 외쳤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같은 해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진상규명에 성큼 다가가는 듯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매장지 10곳을 발굴, 약 1600구의 유해와 5600여 점의 유품을 확인했다.
그러나 4년이었던 진실화해위원회 임기가 2010년 12월 끝나자 이명박 정부는 2년 더 연장할 수 있는 위원회 활동을 종료했다. 그로 인해 모든 발굴 작업은 미완료 상태로 멈췄다.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전라남도 함평군 불갑산 등 도처에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있지만 언제 작업이 재개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에 있는 경산 코발트광산에는 유가족들이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한 유골 80여 구가 컨테이너 박스 안에 보관돼 있다. 여름이면 컨테이너 내부 온도가 70도까지 올라가지만 진실화해위가 발굴한 420여 구만 충북대학교 안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에 안치해둘 수 있기 때문에 달리 보관할 곳이 없다. 충북대 추모관에 두는 것도 임시방편이다. 충북대는 안전행정부와 2015년까지 유해 안치를 계약했고, 이후에는 어디로 옮길지 현재로선 뚜렷한 대책이 없다. 진실화해위가 해체되면서 유해발굴도, 관리도 통제탑을 잃은 셈이다.
희생자 신원 회복은 사회통합의 과정 "진실 규명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을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사회적 의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해 발굴이 중요하죠.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의 육체를 폭력 이전의 상태로 원상회복 할 수는 없겠지만 '죽었으되 죽지 않은 생명'이 돼버린 피학살자들의 유해를 발굴해서 신원을 회복시키는 것은 이들을 우리 사회에 다시 통합시키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지난 2006년부터 5년 동안 진실화해위 주관의 유해발굴팀장을 맡았던 노용석(44) 부산외국어대 인문한국(HK)교수는 유골발굴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노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호국영령' 혹은 전쟁실종자 유해에 대해서는 국가의 의무로 보고 국방부 주관으로 지속적인 발굴작업을 진행하지만, 같은 시기 민간인 피학살자에 대해서는 국가가 제대로 책임을 안지는 차별적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 주도로 유해발굴을 추진한 진실화해위 활동은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후속 조치를 위해 구성된 안전행정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이렇다 할 사업을 하지 않는다고 그는 꼬집었다. 노 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국민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면 이 사회의 통합기제라는 것은 상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행한 기억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라틴 아메리카 노 교수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모범적 사례로 아르헨티나와 과테말라를 꼽았다. 아르헨티나의 EAAF(Argentine Forensic Anthropology Team)와 과테말라의 FAFG(Guatemalan Forensic Anthropology Foundation)는 대표적인 전문유해발굴기관으로, 의학이나 형질인류학 등을 전공한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유해를 발굴하고 유전자(DNA)검사를 통해 가족을 찾아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테러·고문 등을 자행한 '더러운 전쟁'(dirty war) 시기에 실종된 사람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1984년 EAAF를 만들었다. 이 조직은 지금까지도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을 찾기 위해 전 국민적인 채혈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과테말라의 FAFG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과테말라 내전으로 희생된 마야 원주민 약 40만 명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맡았다. 내무부에 유족들이 발굴 요청을 하면 이를 FAFG에서 접수해 현지조사와 유해 감식을 한다. 전문적인 작업이 끝나면 유해는 내무부로 보내 DNA 감식 결과를 토대로 유족에게 인도하거나 기념탑 또는 추모관에 안치한다. 국가기관과 재단 그리고 유족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과테말라는 특히 유해발굴 기록을 각 지역박물관에 보존·전시하면서 불행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을 되새기는 자료로 삼고 있다.
"과테말라 여러 도시의 중앙광장에 있는 성당 마다 기둥과 담벼락에 그 지역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굳이 이름을 남긴 것은 이런 통합의 노력 없이는 사회가 전진하지 못한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