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신성한 산이기에 쉽사리 천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미리 다녀왔던 여행자들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기필코 천지를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북파 일정을 3박 4일로 여유롭게 잡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행운이 함께해서인지 첫날 하늘이 열렸고 환상적인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우리는 찬란한 빛을 받은 천지를 일출과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날은 구름도 자연의 비경에 심취했는지, 백두산 산등성이에서 한동안 쉬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숨죽이며 기다렸던 일행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나 역시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는데, 이런, 갑자기 카메라가 먹통이 됐다. 아뿔싸! 아직 일정이 5일이나 남았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얼추 일출은 담았기에 난 장비를 철수하여 내려왔는데 미련이 남은 일행 중 2~3명은 하늘이 열리길 기다렸단다. 그러던 중 특이한 현상을 목격했다고 했다.
흔히 무지개는 반절만 보이는데 짧은 순간 원통모양의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단다. 그걸 본 이들이 서둘러 셔터를 눌렀는데 다행히도 신비로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카메라가 고장나 애를 태우던 내게 선뜻 카메라 바디를 빌려주겠다던 최태영(54)씨다. "맘씨가 고우니 신도 감동했나?" 그는 '브로켄 현상'이라고 하는 귀한 장면을 담았다.
브로켄 현상, 일명 불광에 대해서는 전날 20여 번이나 백두산에 올랐다는 황의정(60)씨로부터 들었다. 그는 "해발 2000m 이상이면 간혹 나타난다"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설마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일행이 그 모습을 본 것이다. 황씨는 "불광이 나타날 때는 무지개 안에 본인의 모습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사물의 뒤에서 비치는 태양광이 구름이나 안개에 퍼져, 보는 사람의 그림자 주변에 무지개 같은 빛의 띠가 나타나는 일종의 대기광학 현상으로 브로켄의 요괴(Brocken spectre) 또는 브로켄 현상이라고도 한다. '브로켄의 환영'이라고 하며, 브로켄 현상을 처음 발견한 것은 독일의 하르츠(Harz) 산맥에 위치한 브로켄 산(1142m)이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브로켄 현상이라 부르게 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일정에 없던 남파로 향하다북파에서 철수하여 '송강하'라는 지역에서 1박을 하고 남파로 향했다. 원래 남파는 일정에 없었다. 북파에서 원하던 작품을 담았기에 일정을 하루 당겨 남파로 가게 된 것이다. 남파로 가는 길. 철조망 너머로 북한과의 경계선이 보인다. 우린 셔틀버스를 타고 그 옆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저 철조망만 넘으면 우리 민족이 사는 땅인데... 백두산 천지를 우리민족이 사는 북한을 통해서 가지 못하고 중국 땅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돈을 주고 가야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고 한 마디 했다.
구름이 일행을 환영하듯 장엄하게 펼쳐졌다. 예감이 좋다.
길 가장 자리에는 어른 키만큼 높은 잔설이 남아 있고 바로 곁에선 곱게 핀 야생화가 우리를 반겼다.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곳이다. 고산지대이다 보니 꽃들의 키가 아주 작다. 그럼에도 꽃들은 꿋꿋한 자태를 뽐냈다.
남파 정상에 도착하자 구름이 심상치 않다, 부랴부랴 천지가 보이는 장소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황홀한 구름과 천지를 촬영하고 이동하는데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이내 비가 쏟아진다.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작은 초소가 하나 있어 모두들 그곳으로 피해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순간 순간 바뀌는 천지의 날씨를 탓하며 천지가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천지가 짙은 안개로 닫히고 작품을 담느라 보지 못했던 소소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가닥 밧줄로 중국 땅과 북한 땅으로 갈라져있다. 경고문구가 쓰여 있는 푯말이 보이는데 "사사로이 변경을 넘나드는 것을 엄금하며 일체 마약밀수활동을 엄금한다"고 적혀있다.
비는 그쳤으나 안개가 자욱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중국인 어린아이에게 뛰어보라고 부탁했더니, 잘도 뛴다. 사진을 아이 엄마에게 보여주자 메일로 보내달라며 명함을 건네준다. 중국 지질학 연구소에 있는 지질학박사다.
그에게 "백두산의 천지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자 그는 "장백산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며 내가 찍은 장백산 사진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주겠느냐고 되물었다. 무언의 적막감이 잠시 흐르고, 눈인사를 나눈 뒤 헤어져 다시 천지가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천지는 열리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남긴 채 남파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내려오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장엄하게 펼쳐지는 압록강 협곡을 지나게 되었는데, 모습이 장관이었다. 우리는 차를 멈춘 뒤 모두 내려 자연의 경이로움에 탄복을 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변화무쌍한 이곳 날씨에 서서히 적응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