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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휴가 철이면 기껏 시골집 마당에 텐트를 치곤 했던 동생 녀석의 흔적.
여름휴가 철이면 기껏 시골집 마당에 텐트를 치곤 했던 동생 녀석의 흔적. ⓒ 김수복

얼굴을 보면 항상 누이를 삼고 싶다는 엉뚱한 욕망(?)이 발동해서, 공인된 호칭 '제수씨'가 아닌 "아야 영아야(가명)"라고 진짜 손아래 누이를 부르듯이 그렇게 탁 터놓고 정답게 불러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채로 남남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 옛날 제수씨였던 그녀, 지금은 글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그녀, 그녀를 안 본 지도 아니 못 본 지도 벌써 얼마인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 싫어서 안 보는 것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상황이 되고 보니 참 애달프다. 첫아이를 낳던 날의 그녀가 생각나고, 그날을 생각하다 보면 동생 녀석을 그냥 한 대 콱 패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나는 다시 가슴 속에서 흐르는 애달픈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나는 한때 7이라는 숫자에 열광했었다. 행운의 숫자라 해서 은행이나 병원의 번호표에 7자만 들어가도, 새로 이사한 집 주소에 7자 한 개만 들어가 있어도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었다. 그 행운의 숫자 7, 일곱 번째 그러니까 우리 집안에서 일곱 번째 아이가 태어나던 날이었다. 동생이 전화로 소식을 알려왔다. 고대하던 공주님이 드디어 태어났다고, 큰아빠가 얼른 와서 축하하고 이름도 지어 달라고 난리법석을 떠는 아우성이 여간 아니었다.

"야, 제수씨가 애를 낳은 건데, 그런 데를 내가 어떻게 가냐?"
"에이 형, 뭔 소리에요. 뭐 어떻다고, 그냥 뭐, 노고를 치하하는 건데."
"네 마누라 노고를 치하하러 내가 꼭 가야 한다고? 헛, 참 내."

좋으면서도 싫은 척하는 이른바 내숭이 내게 있었다. 이것은 천부적인 것이라서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나는 동생의 방문 요청이 고맙고, 반갑고, 애틋해서 그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만약에 녀석이 큰형은 올 필요 없다고 했다면 나는 아마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는 충동으로 제3한강교 근처를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나는 명색이 장남에 장손씩이나 되면서도 아이를 낳을 만한 사람을 옆에 두지 못한 까닭에 아이가 하나도 없었지만, 동생들은 두루두루 만나서 결혼을 했다. 또 결혼만하면 2~3년 내에 아이를 쏙쏙 잘도 낳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조카의 탄생 현장에도 내가 직접 찾아가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행운의 숫자 일곱 번째의 조카가 태어난 날이었으니까.

꽃집에 들러 장미 한 다발을 고르고 골라서 사 들고, 제수씨가 먹고 싶어 한다는 흰떡도 양껏 사서 들고 찾아갔던 그날의 산부인과 전문병원에서 나는 참 많이도 당혹스러웠다. 산부인과 방문은 처음이었고, 따라서 방문이라기보다는 관광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식의 관광은커녕 의사나 간호사를 찾아가서 아이와 산모의 상태가 어떠한지조차 물어볼 정신이 없이 그냥 허둥거리기만 하다가 나오고 말았다.

아이 낳고 핏기조차 하나도 없는 제수씨의 얼굴을 보니...

뭔가에 된통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은 데다 핏기조차 하나도 없는 제수씨의 얼굴이며 손목이 어찌나 안쓰럽든지. 와락 끌어안고 어깨라도 다독이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이 여겨지든지. 그러면서도 아무런 액션도 취해보지 못한 채 그저 "고생하셨어요"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다 그만 일어서서 나와야만 했다. 아, 지금 생각해도 그날은 참 이상하기만 하다. 십 년도 훨씬 전의 일이건만 어제나 그제쯤의 일이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아릿한 아픔이 가슴에 남아 있는 까닭은 또 무엇인지.

그래서였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제수씨의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바빠지곤 했다. 명절이나 여름 휴가철에 시골집을 찾아오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아이를 낳던 날의 그 퉁퉁 부운 얼굴이 떠오르면서 뭐랄까, 괜히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줘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으로 안절부절 못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손을 잡기는커녕 가능한 한 일 미터 이내로는 접근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제수씨가 늘 그렇게 측은해 보였던 것만은 아니다. 여름 휴가철에 시골집을 찾은 제수씨가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오이넝쿨에 매달린 오이를 보고는 "아! 저거 따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직접 따 보라고 했더니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처럼 탕탕하게 생기발랄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기발랄함 그대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오이넝쿨 앞에 도착해서 손을 내밀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온 동네가 놀라서 기절을 할 정도의 비명을 질러대며 뛰쳐나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20여 미터의 거리를 단 일 초 남짓한 동안에 흡사 천적에 쫓겨 달아나는 목도리 도마뱀처럼 온 몸의 근육을 일시적으로 작동시켜서 펄쩍펄쩍 뛰어 도망쳐 나오는 그녀를 향해 나는 "뭐여, 뭐여"라며 소리치며 허둥지둥 달려 나갔고, 그녀는 금방 죽다가 살아난 표정으로 헐떡헐떡 숨소리를 토해내며 말했다.

"두꺼비예요, 두꺼비, 두꺼비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어요, 어머 세상에 나 어쩌면 좋아, 정말이에요, 두꺼비가, 두꺼비가, 이렇게 큰 두꺼비가요."

그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녀의 이마에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려고 "에라 잇"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었지만, 슬프게도 그 이상은 아무 짓도 못한 채로 슬그머니 도로 손을 내려버리고 있었다. 그놈의 제수씨와 아주버니의 관계라는 것이 이렇게도 인위적으로나마 거리감을 조성해야만 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뭐랄까 이상한 억울함 같은 것이 내 안에서 격렬하게 꿈틀거렸다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없는 사람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사람이다.

해마다 여름 휴가철이면 함께 내려오곤 하던 동생 부부

해마다 여름 휴가철이면 함께 내려오곤 하던 동생 부부 사이에 그 무렵 무슨 틈이 생기고 있었던 것인지 나는 지금도 이유를 제대로는 모른다. 휴가랍시고 동생 녀석이 딸내미 둘만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아마 뭔가를 직감하고 있긴 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가슴이 알아서 먼저 떨리고 있을 정도로 불안한 직감이었고, 불안해서 차마 동생 녀석을 진지하게 붙잡아 앉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고 애써 심상한 어투로 마치 남의 일처럼 "야, 왜 니들만 왔느냐, 애들 엄마는?" 하고 가볍게 한 마디 던지고 말았다.

그 질문에 돌아온 동생 녀석의 대답은 "그냥요, 바빠서요"였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 좋은 세상에서 무슨 별 일이 있겠냐는 듯이, 그래서 달리 아무할 말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한 마디 툭 던져놓고 녀석은 딸내미들과 어울려 마당에 텐트를 설치한다고 야단법석이나 떨고 있었다. 그런 동생 녀석과 조카딸들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바쁘면 바쁘고 그냥이면 그냥인 것이지, 그냥 바쁘다는 건 또 뭐라냐?"라는 식의 말이 되다만 꿍얼거림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동생 녀석은 귀에 들리지도 않다는 듯 열심히 과장된 몸짓으로 텐트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생 녀석이 설치한 텐트를 보는데 신발 세 켤레가 그렇게도 이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있어야 할 신발 한 켤레는 어디로 간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동생 녀석이 설치한 텐트를 보는데 신발 세 켤레가 그렇게도 이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있어야 할 신발 한 켤레는 어디로 간 거야? ⓒ 김수복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쩡한 방을 두고 굳이 마당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딸내미들과 웃고 떠들고 '별지랄'을 다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나로서는 영 불길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뭐 그저 그런 시시한 부부싸움 정도나 했겠지, 부부간에 부부싸움도 없다면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것도 안 좋긴 하지, 등등 뭐 그런 식의 억지춘향 격으로 애써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려 했지 극단적인 쪽으로는 도무지 생각이 뻗어나가지를 않았다.

그렇게 여름휴가를 끝내고 돌아간 동생 녀석은 몇 달 뒤의 추석 명절에도 딸내미들만 데리고 왔다. 나는 다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동생 녀석은 답변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던 듯이 "에이 뭐 쪼금 다퉜어요. 여자들 그렇잖아요. 명절 싫어하잖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입맛이나 쩝쩝 다시고 말았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간 지 열흘쯤이나 지나서 동생 녀석이 아무래도 뭔가 해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든지 문자 하나를 보내왔다.

"형! 사실은 저, 서류상 이혼했어요. 그게 필요하다고 해서."

뭔 소리냐 이게? 계약결혼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아예 혼인신고를 거부하고 그냥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서류상 이혼이라는 말은 나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그 정도쯤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문 사회면에서나 익혀온 단어들일 뿐이었다. 이를테면 뭔가 속임수를 써서 세상을 농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쓰는 수법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양육비를 보조 받기위해 서류상으로 이혼했다고?

그렇다면 동생 부부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 그렇겠지. 정말로 그냥 서류상 이혼을 한 것일 뿐이겠지. 그래, 그런 것쯤이야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개인의 혼인을 국가에 보고하고, 국가가 그것을 기록해 놓고 관리한다는 것은 뭐 그리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그렇다 해도 그렇지, 서류상 이혼을 했을 뿐인데 휴가도 함께 안 오고, 성묘도 함께 못 올 이유까지는 또 뭔가?

몇날 며칠을 혼자서 자문자답에, 추리에, 상상에, 공상에 온갖 '두시럭'을 떨던 나는 마침내 경찰이나 검찰에서 사용한다는 수사기법을 써 보기로 했다. 추리소설 같은 것을 하도 많이 읽어서 자동으로 몸에 익혀진 수사기법을 집요하게 활용한 덕택으로 나는 드디어 동생 부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결과는 가히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었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몰랐는데 둘이 되고 보니 살아내기가 팍팍해졌다나 어쨌다나, 제수씨가 다니던 직장도 육아 문제로 포기하고 보니 써야 할 돈은 늘어나는데 수입은 절반 가까이나 줄어 버렸다고, 그래서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서 이른바 페이퍼컴퍼니를 연상케 하는 서류상 이혼 즉 서류상 싱글맘을 제수씨가 선택했다는 거였다. 싱글맘은 정부에서 아이 한 명당 양육비를 보조해 주니까, 그것을 목적으로 이혼신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내 입에서 덜컥 한 마디가 나왔다.

"아니 젊은 놈들이 무슨 그런 느자구 없는 잔머리나 쓰고 그런다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벌건 대낮에 자동으로 열려 있는 두 눈으로 무엇을 보아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 잔머리를 써서라도 그동안 살아왔다면 살아있었다면,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그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해야 할 일이지 비난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상하게 전도돼 버린 도덕관념이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돌아보면 그랬다. 영구임대 아파트 한 채 배당받는 것이 지상 최대 최고의 희망이자 삶의 목적이기도 했던 그 무렵의 동생 부부가 살아가는 실상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 수중에 돈이 없어 보태줄 입장이 못 되다 보니 아는 것이 오히려 두렵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그들이 제대로 사람처럼 자동으로 잘 살아내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셈이었다.

문제는 서류상 이혼이 서류상 이혼으로만 끝날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정부가 양육비를 보조한다지만 덮어놓고 서류만 보고 지급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기별로, 분기별로 실태파악을 나오는데 그때마다 남자의 옷가지며 소지품이며 하여튼 남자 냄새가 나는 것을 모조리 치워야만 했다. 당연히 남자 사람도 집에 없어야 했다.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생 녀석은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 죽었거나 혹은 실종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살림을 일 년, 이 년, 삼 년여 가까이 살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났고, 큰소리가 나왔고, 이렇게 살 바에는 다 걷어 치고 말자는 소리까지 나오게 되면서 급기야는 각자 방을 얻어 딴살림을 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맡고, 아빠는 돈이나 얼마씩 가져다주는, 아이가 보고 싶을 때나 한 번씩 방문을 하는 그런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류상 이혼도 끝났고, 몸도 따로 살고 있으니 완전무결한 이혼이 돼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삼 년이나 흘렀던가. 제수씨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나는 풍문으로 들었다. 동생 녀석 또한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무결하게 남남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지금, 나의 제수씨라는 틀을 벗어나 버린 지도 오래인 지금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냥 찾아가서 그녀의 어깨라도 한 번쯤은 다독여야지 않을까 하는, 그런 과정이라도 거쳐야지만 내 가슴 속의 애달픔이 덜어질 것 같은데…. 글쎄, 헛된 꿈이나 아닐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있다가 없으니까 응모글



#서류상이혼#양육보조금#제수씨#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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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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