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좋은 것이었다.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열정'은 가슴 속에 품은 열렬한 애정의 힘으로 자발적이고도 폭발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마음이었기에, 밝은 미래를 약속할 것만 같은 가슴뛰는 단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열정, 그 마음이 변했다. 나의 열정인데도 어딘가 온전히 내 것 같지 않다. 열정으로 나는 쉴 새 없이 달렸는데, 어느덧 뒤돌아보면 나의 열정이 낯선 얼굴을 하고 지쳐가는 나를 채찍질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다그치는 열정조차 사그라지면 나는 주저앉은 몸을 일으켜 열정을 펌프질해야 한다. 바야흐로 '나의 열정'이 아닌, '열정 그리고 나'의 시대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위와 같은 표지 제목 아래, 표지 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일을 하잖아!" 대기업 면접부터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청춘에게 내려진 최종명령 '열정노동'저자들은 '열정'이 '명령'되고 있다고 하면서, 열정의 의미가 예전같지 않음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청춘'들의 열정이 '노동시장'을 만나면서 그들 스스로에게도 낯선 것이 되어버린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열정이 새삼 낯선 것은, 비단 청춘들에게 뿐만이 아닐 터. 노동 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불안정한 고용을 방관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하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하는 이들에게 저자들의 진단과 해석은 유효할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 그려진 '열정'은 마치 피카소의 그림처럼 문제시되는 지점과 관점이 조각나 있기에 목차순으로 읽어서는 내용상의 오해의 여지가 있다. 하여, 책의 목차를 해체하고 내용 중심으로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취업준비생들은 '열정스펙'을 준비한다열정의 경험이 스펙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각종 자격증, 수상 경력 등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스펙 삼은 후에도 기업은 자신들의 인재상으로서 '열정'을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이것은 더 이상 경쟁률이 약 30:1이나 되는 대기업에서 지원자를 효과적으로 추려내기 위해 단순한 기술이 아닌, 규모를 불문하고 어느 기업에서나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일반적인 스펙이 되었다. 그래서 취업준비생들은 토익 스펙을 준비하듯 '열정 스펙'을 준비한다.
열정 스펙을 만들기 위해서 청춘들이 열정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펙을 요구하는 타자의 열정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일 것이다. 이 노회한 타자는 예비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자본가 혹은 자본주의적 열망을 심어놓는다. 이제 자본주의의 목소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자본가 혹은 경영자의 지시가 아닌 내부의 울림으로 전해져온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열망이 무엇이다, 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열정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차이는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사람의 열정에는 '사람'으로서의 자아실현 욕구가 포함되어 있다면 자본주의의 열망은 '사람'을 모른다. 자본주의의 열망은 오로지, 사람을 '더 많은 이윤'과 관련한 '노동력' 혹은 '소비자'로서 알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시대의 청춘들과 노동자들이 내면화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갖는 수많은 존엄한 가치들이 지워진 경제적 가치로서의 자신이다. 우리들은 점점 더 한가지 물음에 집착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얼마'의 인간인가. 나는 '얼마'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인가. 나는 '얼마'의 소비력이 있는가. 그 '얼마'는 언제나 부족하고, 그 아귀같은 속삭임은 우리의 자존감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갉아먹는다.
열정이라는 이름의 노동착취 1990년대부터는 민주화를 통해 정치 상황이 완전히 바뀌고 문화향유와 첨단기술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토대 위에서 성장한 신세대가 등장했고, 1990년대 말부터는 '소프트 파워'라는 담론이 등장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문화산업지원 정책에 힘입어서 문화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문화를 마음껏 누리고 자라난 세대가 문화에 종사하고자 하는 꿈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고, 그에 부응하듯 '하나만 잘해도 대학간다'는 이해찬 전 총리의 발언과 함께 특정 분야의 입시전형과 애니메이션학과, 게임학과, 영화과 등의 문화 관련 학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나 문화가 문화산업으로 육성되어 나라안팎으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오는 동안에도 문화예술인에서 문화예술노동자가 된 종사자들의 경제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포화된 노동시장에 계속해서 종사자가 유입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더 치열해진 경쟁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뎌야했다. 바로 '열정'의 힘으로. 그리고 견뎠다. '열정'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문화분야에서의 '열정'은 어찌보면 앞에서 살펴본 일반적인 분야의 '열정'보다는 본래의 '열정'의 의미를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문화가 '산업으로서의' 경제적 가치 순으로 구조가 재편성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문화라는 것의 특성상 '오롯이 저 좋아서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열정'이라고 읽는 사이 그들의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사라져갔다. 이렇듯 문화산업에서 열정은 그 열정 자체보다는,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착취'가 당연시되어버린 산업구조가 더 문제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열정노동'은 사실 이 분야의 노동의 성격과 잘 부합한다. 그래서 저자들도 프로게이머와 영화인 등의 문화분야와 더불어 열정노동이 중시되는 다른 분야들, 예컨대 IT산업 그리고 사회활동가가 있는 정당 및 시민단체의 열정노동의 현장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한 가지, 문화분야에서 이뤄지는 열정노동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자면, 문화를 산업육성의 관점으로 발전시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피하게 노동착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문화는 발빠르게 시장에 대처해야 하는 산업과는 기본적으로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는 느리고, 폭넓게, 쌓이면서 발전해나간다. 따라서 문화분야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화적 산물(결과물)이 아닌 사람에 초점을 두고 투자되어야 하며, 투자의 결과는 언제나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열정이 더 낯설어지기 전에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열정'이 자본주의적으로 재정의되어 '명령'되고 '노동착취'의 숨는 곳이 된 사회적 배경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다양한 통계와 관련 저서들을 통해서 각 분야의 사정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읽을 만한 책이다. 그리고 읽는 과정에서 '나'의 열정을 점검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뒤돌아보면 과연 나의 열정은 지금 어떤 얼굴로 나를 움직이고 있을 것인가. 다만 아쉬운 것은 목차상의 문제인지, 문제지점의 다면성 때문인지 '열정'이라는 단어의 가치조차 부정돼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p.235결국 문제의 핵심은 열정의 반복이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 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 운동이 파편화된 시대에 활동간들은 새롭게 노동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새로운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노동의 역할을 찾지 못했다. 이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면 여전히 열정이 필요하며, 사라져 가는 열정이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를 비판한다. 하지만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는 따르려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모순이, 혹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도 말미에 적시하고 있듯이 열정은 여전히 '좋은' 단어일 수 있다. 문제는 열정의 진짜 주체와 그 내용이다. 우리는 조금 더 용기내어야 한다. 교묘하게 명령되는 타자의 열정을 거부하고, 저마다 애오라지 자기 마음의 밭에서 옴팍 솟아난, 자신이 잉태한, 오직 자신만이 고삐쥘 수 있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이든, 아니든, 시대정신을 닮은 것이든, 판단하고 키워나가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일 것이다.
동시에, 열정이란 이름으로 노동착취가 이뤄지는 분야의 산업구조에 대해서 종사자들은 물론, 여론의 목소리를 모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열정'과 '노동' 이란 두 단어 모두가 푸념과 우울증 걸린 탄식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가슴뛰는 본래의 마땅한 자리를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