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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보고대회'에 참석차 나고야를 방문한 것은 지난 11월 18일~19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에서 참가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적잖이 망설인 게 사실이다. 오랫동안 몸소 투쟁해온 시민모임 식구들을 제치고 의무감이랍시고 글 몇 줄 끄적거리는 입장에서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국에서 보내온 '일본 소송 이후 14년 투쟁에 걸친 귀결점, 나고야 시민들과의 연대와 우의, 항소에 따른 한일 연대 투쟁에 대한 결의'라는 보고대회 의의에 대한 글귀를 보고,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고 싶은 생각을 접을 수 없었다.

 

나고야 가는 길, 마쓰다 도키코를 떠올리다

 

 마쓰다 도키코, 서재에서(95세 때)
마쓰다 도키코, 서재에서(95세 때) ⓒ 김정훈

 

나고야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이동하는 순간순간 평생을 징용 피해자 문제에 천착한 작가 마쓰다 도키코를 떠올렸다. 

 

마쓰다 도키코에게 징용 피해자 사건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사건은 해방 후인 1940년대 말부터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 알려지는데, 소식을 접한 마쓰다 도키코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했다. 중국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 피해에 대해서도 항상 의식했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전쟁 중 일본에 강제로 연행되어 하나오카 광산에 투입된 중국인 포로가 패전 직전 폭동을 일으켜 수백 명이 학살당해 그 유골이 지금도 하나오카 땅에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중략)…이를 철저히 규명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는 동시에 '거기에서 분명 그 이전에 일본인이나 조선인 노동자도 전시체제인 만큼 노동 강화로 희생된 게 아닐까', '광산 지대에서는 평화로울 때도 기아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끊임없으므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하나오카 광산의 참극>(汐文社, 1975)
  
무엇보다 자신의 환경과 배경을 공유하는 대상에 마쓰다의 애정은 깊었고, 노동자에 대한 그녀의 동정심 또한 거기에서 발동하고 있었으리라. 어째서 노동자는 그와 같은 빈곤과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노동이란 말인가. 마쓰다의 의문은 성장과정 중 광부의 딸 입장에서 주시해온 일상에 대한 회의감인 동시에 가해자 측이 피해자 측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행위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 저항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선 예리한 비판과 약자를 향한 끝없는 배려로 이어진 것이었기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작 <땅밑의 사람들>에도 상세히 그려지지만, 실제로 전쟁에 집착한 일본 군국주의는 군수산업과 증산을 위해 막대한 노동력을 요구했고, 이국 노동자들을 광산이나 조선소 등으로 강제로 연행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당시 소녀)들도 그와 같은 이유로 같은 시기에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제작소 등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 땅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도난카이 지진으로 유명을 달리한 경우도 있었으며, 해방 후 노동 가치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귀국했다.

 

임금을 지불하겠다는 회사 측 관계자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시까지, 또한 그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회사 측으로부터 일언반구도 없었다. 피해자들이 세월이 흐른 후 덧없이 흘려보낸 청춘이 너무나도 아쉬워 소송을 제기하고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1999년 일본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나고야지법 소송 제기 후 2008년 일본최고재판소 기각 판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일상을 보내야 했을까? 또한 2010년부터 진행해온 미쓰비시 측과의 16차례에 걸친 협상 결렬에 피해자 할머니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할머니들이 노동한 대가에 대한 배상을 호소하며,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국내의 광주지법에 제기한 것은 작년 10월.


2012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이어받아 지난 11월 1일 광주지법에서도 드디어 승소판결이 났다. 할머니들, 시민단체, 변호인모두 감격에 겨워 만세 삼창을 외쳤지만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수는 없다. 미쓰비시 측이 개인보상은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해결된 상태라며 항소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법원에서도 같은 판결 선고 시에는 일본 정부가 앞장서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중재를 의뢰한다고 하니 저들의 제국주의적 근성에 치가 떨릴 뿐이다.

 

이국땅에서 중노동... 재해로 목숨까지 잃었는데 


나고야 공항에 마중 나온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회원들은 평범한 복장을 한 여느 일본 가정의 아저씨, 아주머니. 하지만 눈빛엔 범상함을 넘어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이들이 그토록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미쓰비시 측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자비를 털어 나고야와 도쿄를 오가며, 금요시위를 열었단 말인가. 이들이야말로 정녕 숨은 양심가요, 혁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고야 메이난후레아이병원 앞의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 기념비에 참배했을 땐, 희생자 가족의 진술을 떠올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1944년 12월 7일 오후 1시 반경, 점심 식사 후 일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중략)…작업장으로 돌아와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테이블이 흔들흔들 움직였고 한네 반장이 "지진이다. 피해라, 피해라"라고 외쳤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정면 입구가 막혀서 나갈 수 없었기에 통로가 있던 기계 밑에 몸을 숨겼다. 숨은 곳에서 보니까 원고가 있던 통로 북쪽 방향에서 김순례가 도망쳐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순례는 원고가 숨어 있는 곳으로 도착하기 전 벽과 지붕이 무너져 거기에 깔리고 말았다(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손해배상 청구사건 제 2차 소송 소장에 수록).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 기념비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 기념비 ⓒ 김정훈


이국땅에서 중노동에 시달렸음은 물론, 재해로 목숨을 읽었으니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이런데도 미쓰비시 측에서는 조약이나 협정만 내세워 모든 게 해결됐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한일협정 문구 해석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 미쓰비시 측과 한일 시민단체의 견해가 다르다. 하지만 여러 근거가 있는 만큼 우리 측 법률가들에 의한 논증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헌데 필자에겐 이 현안이 고바야시 다키지나 마쓰다 도키코와 같은 작가의 노동자 문제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


사실 어찌 보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 가공선> 장면처럼 일본의 권력과 결탁한 자본가의 이윤 추구로 임금을 착취당하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약속한 임금 한 푼 받지 못했기에 인권회복과 생존권 차원에서 세월은 흘렀지만, 이젠 노동한 가치에 대해 보상받으려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어째서 니시마쓰 건설 측에서는 중국인 징용 피해자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까? 한일협정과 조약 등 법적 문제를 떠나 강압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한 범법행위에 대해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자성하는 표현 아니었을까? 자성은커녕 조선인 강제징용소를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일본은 철면피가 아니고 무엇이랴!


고바야시 다키지 작품 <게 가공선>의 노동자가 노동력 착취 현실에 견디다 못해 봉기를 일으킨 것처럼 근로정신대 노동자(할머니들)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노동자 인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며 일본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자의 권익에 천착한 고바야시 다키지의 문제와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노동자의 권익과 인권에 관한 문제라면 고바야시 다키지와 동향 출신 작가 마쓰다 도키코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본군과 악랄한 자본계급에 의해 인권과 자유를 유린당하며 각종 폭력과 린치의 대상이 되어 시달리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동정 어린 시선은 그런 체험이 쌓여 비롯된 것이었다.


마쓰다의 '의무감'은 문필활동과 현지 조사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땅밑의 사람들>을 비롯해 르포 <하나오카 사건 각서>와 <유골을 보내며> <뼈> 그리고 리포트 <하나오카 광산을 찾아서> 등을 통해 노동자 탄압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졌고, 그 사건의 배경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키타현 아라카와 광산 출신의 딸이 그 지역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인간학대와 노동자봉기 사건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만천하에 고발하는 일, 그것은 일본사회의 독선과 부정에 맞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한국 보수언론 치부 지적하는 일본인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 보고대회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 보고대회 ⓒ 김정훈


보고대회가 열린 곳은 '공립학교공제조합 나고야숙박소'인 나고야 루부라왕산 호텔. 18일 늦은 오후 이곳에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과 우리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승소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리고 앞으로의 투쟁 계획과 연대의 결의를 다졌다. 토론을 청취하던 필자가 법률적 용어 해석에 난감해 하던 순간 귀가 번쩍 뜨이는 발언이 일본인에게서 나왔다.

 

국내의 한 언론이 "근로정신대 소송에 대해 한일협정으로 일단락된 일인데 자꾸 거론하면 국가 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도한 사실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 나고야 지원단체의 한 회원이 우리 보수언론의 치부를 지적하다니 참으로 투사다운 모습이었다. 그곳에 모인 일본 분들은 모두 그와 같은 양심과 눈빛의 소유자들이리라.


부산에 도착하자 강제징용 피해자 명부가 발견된 것과 일본 관방장관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망언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대표는 일본제국주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을 듯한 자세로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쓰다 도키코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연행 문제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건(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사건) 전시 일본의 1억 원 국민에게 부과된 군사적 생산 총동원 체제하에서 일어난 무수한 비운과 직접 연결된 학대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러한 진실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침략전쟁 그 자체였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현안과 맥이 닿는 내용이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 광주법원 승소 이후 일본 정부와 자본권력의 대응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 보고대회를 준비하신 일본 근로정신대 지원회 여러분과 수고하신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분들께 진심으로 사의를 표한다.

덧붙이는 글 | 김정훈 기자는 전남과학대학교 교수입니다. 이글은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도 실렸습니다. 


#근로정신대#마쓰다 도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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