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세밑. 우리는 강정에서, 밀양에서, 용산에서, 쌍용자동차에서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철도 노동자들의 민영화 반대 파업을 불법으로 몰며 8000여명을 직위해제하고 지도부를 수배한 것도 모자라 사상 유례 없는 민주노총 침탈을 자행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이 반대하는 밀양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고,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의 불법대선개입에 대한 시민들의 질타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안녕치 못한 한 해였습니다. 시간의 퇴행에 시대가 아프지만, 그래도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따뜻하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에 기륭전자(현 렉스엘이앤지) 조합원들은 기막힌 일을 당해야 했습니다.
새해 이틀 앞두고 사무실이 사라졌다
지난해 12월 30일 아침. 기륭본사에 출근을 하니,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회사는 새벽부터 이삿짐을 꾸려 물건이 거의 빠진 상태였고 조합원들이 대기하고 있던 회의실 등에 약간의 짐만 남아 있었습니다.
너무나 황당한 상황이라 회사 총무부장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항의 했지만 묵묵부답이었고, "어디로 이사를 하는 거냐"는 질문에도 그는 어물거리며 답하지 않았습니다. 60~70년대나 들어 봄직한 야반도주,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 회사가 몰래 본사를 이전하는 꼴을 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회사는 2013년 복직한 조합원 10명만 빼고 몰래 이사를 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조합원은 나머지 짐을 빼지 못하게 하고, 이전한 본사를 밝히지 않는 한 현재 본사건물에서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전 조합원이 철야농성에 돌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야농성 5일차인 3일 현재까지 최동열 기륭전자 회장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습니다. 기륭전자 홈페이지에 공지되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도 불통입니다. 기륭전자가 만든 오토바이 내비게이션을 수리하러 본사로 오신 분도 텅 빈 사무실을 보고 황당해 하며 "회사가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최동열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1월 1일에도 찾아가 왜 몰래 본사를 이전했는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묵묵부답. 최동열 회장집 인터폰을 눌러도 답이 없어 대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나타난 것은 회장이 아니라 경찰들이었습니다.
지난 2일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최동열 회장은 "회사 규모가 축소돼 예전 기륭사옥 옆 ㅅ오피스로 이전했다"면서 "(노조원들이 회사를) 불법 점거하려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우리 회사 노조원들이 아니다, 지금은 회사가 너무 어렵다"고 해명했다고 합니다.
1895일간 투쟁해 복직했지만, 돌아온 건 임금 체불기륭전자 여성비정규노동자들은 불법파견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1895일간 투쟁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2010년 11월 국회에서 사측과 '정규직으로 고용한다'는 내용이 담긴 합의서 조인식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유예기간을 갖게 되었고, 조합원들은 2년 6개월의 기다림 끝에 지난해 5월 복직했습니다.
그런데 사측은 복직한 노동자들에게 8개월여 동안(2013년 12월 현재까지)이나 업무를 주지 않았고, 임금도 체불해 왔습니다. 수차례 노사협의회 및 단체교섭을 했지만, '회사가 어려우니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사측이 '일하지 않으면 직원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고, 이에 조합원들은 8월 29일 또다시 투쟁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어렵다면서도 최동열 회장은 운전기사를 새로 고용하고, 이사진을 확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무팀 직원도 충원을 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회사는 19억의 자금을 투자 받은 상황이라 의지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외면했습니다.
최동열 회장은 기륭전자를 인수한 후 기륭전자가 가지고 있던 땅과 건물 등 고정자산 대부분을 매각해 현재 상장회사란 이름만 있는 껍데기로 만들었습니다. 수차례 불성실공시로 거래정지를 받았고, 현재는 상장폐지실질심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도 지난 7월 19억의 투자를 유치했고, 12월 31일까지 16억 규모의 LED TV를 납품하고, 3800대의 셋톱박스를 베트남국영방송국에 납품한다고 공시를 한 상황입니다. 상장폐지실질심사를 하는 기업심사위원회에도 중국에서 생산하여 납품할 것이라고 최근까지 보고했다고 합니다.
9월부터 본사로 출근하지 않은 기륭전자 임원진
최동열 회장과 임원진, 재무팀 직원들은 지난 9월 중순부터 기륭본사로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본사엔 총무부장과 A/S담당 과장만이 출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사로 출근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상장폐지실질심사 때문에 거래소로 출근하고 있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2월 16일께 건물주가 관리비가 체납되었다며 단전단수를 하겠다는 공고와 사무실을 비워달라는 공고를 붙였습니다. 체납액을 물으니 5000만 원이라고 합니다. 3/4분기 5억 8000만 원의 흑자공시를 한 상태여서 왜 체납을 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체납액을 납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몰래 본사이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야반도주를 한 다음날인 12월 31일 공시를 통해 자금사정으로 인해 16억 LED TV 납품은 계약해지가 되었고, 셋톱박스는 2014년 6월로 납품 연기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벌어진 여러 상황들로 볼 때 기륭전자 경영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무엇 하나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어 실체적 현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지난해 8월 29일 투쟁선포를 하면서 '사회적 합의 이행'과 '경영투명성 보장'을 요구사항으로 밝혔습니다. 이 요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또다시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 회사를 거덜 냈다면 그에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투쟁을 통해 만들어 갈 것입니다.
현재 계획으로는 철야농성을 지속하고, 현 기륭 본사 앞 집회와 최동열 회장 집 앞 집회, 증권거래소 앞 집회 등도 병행할 것입니다. 또 앞으로 사회적 합의 이행 및 기업 투기화에 대한 사례 및 대안마련 토론회 등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사측과 싸우면서 우리가 느낀 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서 불법을 당해도 보호받지 못하는 3등 국민 신세라는 억울함이었습니다. 모두가 체념과 포기를 말할 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하며 싸워 온 1895일의 투쟁, 죽음 빼고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복귀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8개월째 임금체불도 모자라 본사가 야반도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인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고용안정을 위해 가난과 차별의 상징 비정규직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다, 대안이 없다, 현실을 인정하라'고도 했지만, 더 많은 이들이 1895일을 연대와 우애로 함께해 주었습니다. 사회적 약속이 휴지 조각이 되고, 최소한의 신의와 원칙이 반칙에 상처받은 현실에서 우리는 또다시 많은 분들의 연대의 힘을 믿고 투쟁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소연 기자는 전 기륭전자 분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