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 동안 단 한 번도 비엔티안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 새삼 놀란다. 이런 강렬한 태양과 흙먼지 날리는 땅 위에 서너 달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면, 저 메콩 강이 유일한 물줄기였을 것이다. 제프리삭스가 "빈곤의 종말"에서 국제경제 성장(혹은 빈곤 탈출)에 치명적인 지리적인 조건을 가진 볼리비아를 안타까워 하던 바와 마찬가지로, 라오스는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산악 지형이 전체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륙국가이다. 낮은 인구 밀도와지리적 접근성을 떨어드리는 험준한 산세는 가난한 라오스의 사람들의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며, 습하고 더운날씨로 말라리아를 비롯한 전염성 감염병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라오스의 건강 상태는 동남아시아의 주변국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열악한 수준이다.
주변 국가들이 무서운 속도의 경제 성장과 함께 사람들의 생활과 모습에서도 가시적인 변화가 보인다고 이야기 되는 것에 비해 삶의 속도가느리고 맑은 웃음을 가졌다는 칭송을 받곤 하는 라오스의 모성사망률(Maternal mortality ratio, 출생아 10만 명 당 사망 수)은 357로우리나라의 36배에 달한다. 현재 많은 국제 개발 기구들이 라오스 사람들의 빈곤 탈출과 건강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나의 인턴쉽은 그를 위한 거대한 움직임 속에 동참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라오스 세계보건기구(WHO)의 인턴쉽을 오게 되면서 목적하던 것은 크게 나누어서 세 가지 정도였다.먼저, 국제보건과 국제보건사업, 그리고이를 위하여 일하는 WHO를 비롯한 개발 파트너(developmentalpartner)에 대해서 현실적인 관찰을 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진로 결정을 위한 사전 탐색이다. 여전히 학생으로 본격적으로 링 위에 오르지 못하고 기웃거리는 처지가 불편하기에 고민이 커지던 차였다. WHO나 우리 나라의 양자간(bilateral) 해외원조기구인 KOICA(한국국제협력재단)나 KOFIH(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의 업무와 생활이 어떤모습인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라오스에 가서 일하시고 계신 선생님들을만나면 최대한 이것저것 많이 여쭙고 파악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는 하는 일 없이 바쁘고 어느것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생활을 끊어내고 싶었다. 24시간 인터넷과 SNS에 연결되어 거미줄에 대롱대롱 얽혀 헤매는 일상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야 늘 하던 것이니좋은 기회였다. 혹자는 욕망이 멈추는 나라라며 라오스를 칭송하지 않았던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인터넷 상황이 열악한 곳에서 어딘 가에 연결되지 않은 온전한 제정신을 되찾을수 있겠거니 기대해 보는 거다.
소소한 사건과 세부적인과정을 모두 설명하자면 상당히 긴 글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이제 곧 떠나야 할 비엔티안의 이 따스한 날씨 속에서 파견의 마무리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먼저,7주 동안의 인턴쉽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많은 생각과 관점들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었다.사실 가장 강렬했던 것은 조직 생활과 관료제에 대한 경험이었다. 보고서나 선언을 통해서접하게 되던 WHO가 현실에 잡혀있는 조직의 하나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하다니. WHO 역시 바닥과 벽과 책상과 먼지 쌓인 코드뭉치로 된 사무실을 가진 세계 정부 UN에 소속된 관료 조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은 나의 어리숙함 때문이겠으나 WHO, World Bank, IMF, UNICEF 에서 일한다는 것은 세계정부의 공무원이 된다는 것임을 충분히관찰할 수 있었다.
풍성한 관찰과 경험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감사할 일이다. 기술적 자문(technicalconsultation)이라는 WHO의 역할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으니더욱 그렇다. 내가 파견되어 일하였던 WHO 라오스 국가 사무소의 모자보건팀에서는 라오스의 중앙 보건부처의모자보건국의 업무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하는 것이었다.
WHO 외의 다른 개발 파트너(developmental partner)들을 만나고, 어떤 이슈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배우고, 수렴하여주장을 만들고, 근거에 따라 적절하게 국가 정책이 수립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공식적으로 국제보건원조에서라오스 보건부처의 사무국(secretariat)을 맡고 있는 WHO의역할이기도 했다.
이전에 나는 원조국과 개발 파트너들의협력과 수원국의 주도(ownership)가 중요하다는 논의에서 그 행위의 주체가 각각 서로 다른 지향과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피상적으로 당위에 기반을 둔 이야기를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라오스 아기와 엄마들의 건강한 삶이라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한다 하더라도서로 다른 언어와 국적, 수단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협조하여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원조효율성 제고를 위한 파리 선언의 Ownership, Alignment, Harmonization, Results, Mutualaccountability, 이 다섯 단어 하나 하나가 온전히 절실한 마음이 되었으니 인턴쉽의 첫 번째 목적은 그럭저럭 제대로달성했다 해야겠다.
국제 보건에 종사하고 계신 선생님들과이야기를 나누고 생활상을 들여다보리라는 욕심도 넘치도록 채웠다. 물론 두 달 사이에 파악할수 있는 내용은 제한이 있겠지만 비엔티안에서, 그리고 필드 트립에서 24시간을함께 하며 지겹도록 쫓아다녔다. UN 산하 조직에서일하는 분들 외에도 KOICA나 KOIFH의 선생님들과의 이야기에서도 여러 가지 궁금했던 부분들을 여쭐 수 있었다. 게다가 라오스에 대해서 의문나는 점을 물으면 묻는대로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력3~4년 차 파견 근무 중인 선생님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라오스 생활의 큰 수확이었다.
국제보건 혹은 국제원조사업을 위한 파견지에서의근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생활을 예상 혹은 기대해야 하는지, 어떤 고충과 고민이 있고 한국에서의 근무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투박하게윤곽이나마 지켜볼 수 있었으니 두 번째 목적도 그럭저럭 채워낸 셈이다.
내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핸드폰으로 인터넷 연결을 굳이 시도하지 않았던 첫 번째 달은 확실히,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검색과 연락을 그치지 않던 핸드폰이 무용지물이 되니 이 갑갑한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기는했지만 필요했던 쉼표였다. 느려진 생각은 좀 더 치밀할 수 있었고 뭐든 대강대강 훑고 넘어가는데에 익숙했던 내가 이전의 사건과 생각들을 하나하나 복기해가며 검토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곧 불편함을 참는 것도 의미가있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3G와 와이파이가 흐르는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을발견한 것은 금방이었다. 의도적인 인터넷 차단의 시간이 필요하고 생산적일 수 있음을 경험했으니, 한국에서도 이런 연결과 차단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는앞으로 돌아가는 한국에서 완수해야 할 과제이겠다.
예상하지 않았지만 얻어 가는 것들도 기억하고싶다. 라오스에 와서 드비쉬(Debussy)와 에릭 사티(Erik Satie)의 피아노곡을 배워서돌아가게 될 거라고 예상이나 했던가. 함께 비엔티안의 길을 걷노라면 선생님들의 학창시절과 90년대의 로망, 세계의 곳곳을 걷던 선생님들의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곳곳에 떨어져 있던 라오스의 국화인 새하얀 짬빠(Cham pa)꽃의 향긋함과 간간이 들려오던 프랑스어의 아름다움도 기억에 남겠지.
오스카 베겔의 '인도차이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베트남인은 벼를 자라게 하고
캄보디아인은 벼가 자라는 것을 바라보고
라오스인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아무리 순한 눈을 한 사람들이사는 라오스 역시 개방과 시장이 미치는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벌써 2012년의 남푸광장과2014년의 남푸가 서로 다른 모양을가지는 건 그만큼 변하고 있는 라오스의 사람들과 사회와 문화를 반영한다. 성장률 8%에 육박하는 라오스의 경제성장과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주변 국가-특히 중국, 베트남-를생각했을 때 아마 앞으로도 라오스는 갈 때 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과연자본과 시장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던 라오스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 시키게 될까. 그 변화는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될 수 있을까.
2014년의 라오스에서 배우고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하면서, 부디라오스의 경제성장이 더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으로 나누어지길, 그리고 그 곳에서 고군분투하고계신 선생님들의 노력이 결실을 얻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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