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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가 밥 같은 것이었다면 나도 정말 좋겠지만 놀이가 밥은 아니다. 놀이가 밥이라고 비유하는 절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비유에 곤란한 점이 셋 있다. 비유는 인식과 맞물리고 인식은 실천과 맞물린다. 적절한 실천과 인식을 위해 비유에 담기 힘든 현실을 함께 차분히 바라보자.

첫째, 놀이가 밥이면 대한민국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사는 성인은 모두 아이들에게 밥도 안 차려주는 파렴치한 사람들이다. 아이들에게 밥을 충분히 줄 수 있는데 고의로 굶기는 어른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다 한 끼를 굶기는 정도가 아니라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10년 넘는 기간 동안 아동들에게 밥을 제대로 주지 않는 이들에게 무슨 처벌을 내려야 할까? 그런데 대한민국 성인 중에 이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놀이가 밥이라고 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파렴치한이 된다. 그러나 우리 20세기 소년소녀들은 본인들이 숨쉬고 먹고 살 틈도겨우 만드는지라 21세기 소년소녀들의 놀이까지 보살펴주기가 어렵다. '놀이가 밥이다'라는 식의 도덕적이고 선언적인 명제가 한 달의 카드대금을 갚느라 허덕이는 나 너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둘째, 놀이가 밥이라면 2014년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맘껏 먹이기 위해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최신형 스마트폰과태블릿과 개인용 컴퓨터를 구비해줘야 한다. 놀이란 무엇인가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대의 놀이를 논하려면 디지털 디바이스를 뺄 수 없다. 디지털기기를 이용하는 놀이를 짝퉁놀이라고 주장하기는 쉽다.

그러나 현재 성인과 미성년을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구성원들이 놀이로 여기는 것 중에 음주/가무와 게임과 TV쇼시청을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지금 아이들을 학원셔틀과 학업노역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언제 어디서나 웹툰과 동영상과 게임과 채팅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고 전자매체를 이용하는 놀이는 놀이가 아니라고 하면 그저 억지부리기에 불과하다. 게임 등의 전자매체 놀이는 그것 이외의 다른 놀이가 거의 절멸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놀이의 다양성이 곧 문화의 다양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의 다양성과 놀이의 다양성은 거의 구호로만 존재한다. 놀이의 다양성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해야 할 때 놀이밥 비유는 내 아이의 밥상부터 챙기는 개별적 실천으로만 이어지기 쉽다.

셋째 놀이는 밥보다는 다른 필수 생존물질이나 환경에 가깝다. 굳이 비유하자면 놀이는 맑은 공기와 물을 제공하는 풍요로운 생태계에 가깝다. 놀이가 정말 밥이라면 빵이나 면이나 피자나 떡 등등 다른 대체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놀이는 밥이다'라고 할 때 그 밥은 빵과 고기와 면으로 대체가능한 음식의 한 종류가 아니라 '끼니'나 '식사'에 가깝다.

놀이가 식사에 가깝다면 어른들이 마음을 뉘우치고 이제라도 놀이밥을 지어 먹이면 아이들이 마음껏 놀이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반성과 실천만으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현재 부모세대 대다수가 어린 시절 마음껏 놀이를 누렸다가 90년대를 지나며 아이들이 골목과 놀이터에서 사라진 까닭이 현 노인세대는 예전에 놀이밥을 잘 지어주었지만 지금 부모세대는 지어주지 않아서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의 놀 권리가 지켜지고 놀이할 자유를 누리고 놀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이뤄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핵발전과 황사의 위협이 없어져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방사능과 살인미세먼지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현실적인것만 따지면 뉴질랜드나 북유럽으로 이민가야지 한국에서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핀란드에서 한국부모들이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선행학습을 기어코 시켜서 물의를 일으킨다는 뉴스를 보면 어딜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필자 같은 경우 이웃들로부터 '저 집에서 애들 학원 안 보내고 놀게만 두니까 우리 애들도 물든다''남들다 보내는 학원 학습지를 안 하다니 애들 데리고 실험하냐'는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

아이들의 놀고픈 마음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화 되기 위해 여태 기울인 노력은 그저 놀이밥을 지어 먹이는 수고로움이 아니었다. 시대의 대세와 흐름에 맞서 반기를 든 반동분자나 게릴라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생활이었다.

이제부터 놀이밥을 잘 챙기겠다는 다짐으로 현실은 꿈쩍조차 않을 것이다. 현실이 단단하다고 지레 포기할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 몇 가지 대안을 궁리해 둔 것이 있는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면 훨씬 좋은 대안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안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대안이 없어서 현실이 이지경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각성과 실천이 안 따르면 대안이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다. '요즘 애들 안 됐다'는 한탄만 하는 건 어른답지 않다. 각자가 대안을 만들고 현실에서 살짝 꼼지락거리기만 해도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 널리 퍼진다. 일단 대안 다섯 가지 정도를 보탠다.

1. 미국의 국립놀이연구소나 영국의 플레이잉글랜드 등을 참고해서 기관을 만들어 놀이 관련하여 각종 이론과 실제, 정책과법을 연구하고 보통 부모들과 교사들이 일상에서 실천 할 수 있는 다양한 모델과 대안을 생산하고 실험한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놀권리'에 대한 시민교육을 실시하고 이 권리를 침해하는 학교나 기관을 조사한다. 2. 초등학교에서 교사의 통제와 계획에 의거한 가을운동회를 자유놀이운동회로 새로이 설계한다. 간단한 매뉴얼 제작과 시범학교 운영 만으로학교가 달라질 것이다. 3. 상업적이고 기만적인 어린이날 대신에 가장 뛰어 놀기 좋은 봄과 가을에 '자유 놀이 주간'을 만들어 잠시만이라도 사교육에서 해방시켜 준다. 4. 다양한 놀이에 대한 동영상이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놀이 아카이브'를 구축한다.5. '어린이놀이 헌장'을반포하여 아동/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직접 인식하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

덧붙이는 글 | 놀이네트 –아이들의 놀고 싶은 마음에 응답하고 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놀이운동을 합니다. (트위터 @wwwplaykoreanet)



태그:#놀이, #놀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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