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시절이다. 염치 있는 인간들은 개인과 국가의 무기력함에 분노하고, 분노하다 결국엔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다시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여전히 규명되지 않는 진실과 후안무치한 인간들의 언행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
조절되지 않는 분노와 무기력의 반복에 상처는 깊어만 간다. 누구는 원망과 욕설을 입에 달고 살고, 누구는 토악질을하듯 SNS에 글을 끄적거린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내는 "아이들이 불쌍해"라며 갑자기 오열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묵묵히 지켜 볼 따름이다. 술에 취해 귀가한 아버지는 곤히 잠든 자식들을 보며 눈물을 쏟아 낸다. 안도의 눈물이 아니라 구하지 못한 생명에 대한 죄책감과 자식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의 눈물이다. 누구도 누구를 위로하지 못하고 각자도생을 도모해야 하는 세상. 우리 사회의 진짜 비극은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인의 집밥 초대... 밥다운 밥을 먹었다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집에서 밥이나 한 끼 먹자"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살아 있음이 죄스럽고 먹는 것이 염치없게 느껴지는 시절에 식사 초대라니,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밥상은 단출했다. 잘 익은 김장김치를 멸치만 넣고 졸여낸 김치지짐에 가지나물·취나물·무말랭이·가죽장아찌 등이 곁들여졌고, 풀만 놓인 밥상이 겸연쩍었던지 큰 접시에 담긴 돼지고기두루치기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숟가락 적시라고 우거지를 넣고 집된장을 풀어 끓인 국 한 사발씩이 놓였다. 산해진미가 차려진들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 소박하고 사려 깊음이 오히려 새삼스럽고 감사했다.
마지막 순서로 밥이 나왔다. 분청색 자기에 담긴 그저 흔한 쌀밥일 따름이었다. 밥솥에서 금방 퍼낸 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열기에 실려 퍼진 밥내가 비강을 자극했다. 그 순간 오장육부 한 구석에서 뜨거운 뭔가가 꿈틀거렸다. 슬픔이 아니라 강렬한 식욕이었다.
참을 수 없는 식욕은 곧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김치지짐은 양손으로 쭉쭉 찢어 밥에 올려 먹었고, 돼지고기두루치기는 밥 한 술 곁들여 상추에 싸 볼이 미어지도록 구겨 넣었다. 가지나물에도 취나물에도 가죽장아찌에도 분주히 젓가락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밥그릇도 국사발도 바닥을 보였다.
이렇게 밥다운 밥이 대체 얼마만인가 싶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는 밥상에 맛있는 음식이 놓이면 "이거 다 비우면 눈 뜨기가 훨씬 낫다"는 말로 손주를 재촉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밥상을 말끔히 비우고 나니 눈이 맑아졌고, 눈이 맑아지니 사람이 보였고, 사람이 보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집에서 밥이나 한 끼 먹자"던 지인의 말이 그때서야 이해가 됐다. 말인즉슨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였던 셈이다.
밥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밥을 권해 왔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은 일상적인 안부인사가 되었다. 인간의 염치와 정성을 보여주고 확인할 수 있는, 아울러 서로의 존재를 각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사회든 감동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나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마저도 느낄 기력이 없을 때는 위로·위안·격려 등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1997년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이 온 국민을 감동 시켰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작은 금붙이조차도 내놓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혹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국가적인 퍼포먼스가 감동으로 다가왔을까? 오히려 더 큰 상실감만 느끼지 않았을까? 울고 나서도 개운치 않고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여전히 암담하기만 한 현실에서는 차라리 밥 한 끼 권하는 편이 낫다.
밥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그렇다고 밥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음식은 그저 생존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일 따름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밥은 최소한이다. 인간이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소설가 김훈은 "밥은 삶이며 정서이다. 밥은 추상이 아니다. 밥은 개인의 목구멍을 넘어갈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무늬 지어주고 시대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뜸이 든다. 밥은 서정이며, 또 서사인 것이다"라고 했다. 혼자 먹는 밥은 추상이고 서정에 지나지 않는다. 밥은 나눔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서사가 되고 관계의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지금이야말로 밥을 권하고 나눌 적기다.
자고로 인간은 혼자 먹는 음식에는 지극한 정성을 쏟지 못하는 반면, 누군가를 대접할 때는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정성은 대상이 분명할수록, 대상에 대한 애정이 강할수록 정비례한다. 밥의 속성이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밥을 나누는 것은 상대에 대한 위로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하다.
체력에 한계가 있듯 감정에도 한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의 끝은 다시금 비루한 일상이다. 바닥까지 슬퍼하고 미친 듯이 분노한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더 큰 비극과 조우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싸움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연대와 행동은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성금운동 따위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돈 몇 푼 낸다고 아픔이 치유되고 죄책감이 덜어지지 않는다. 돈은 목적이 분명하고 시기가 맞아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국가적 앵벌이에 뜯길 돈이 있으시거든 차라리 좋은 쌀을 살 것을 권한다.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 정성껏 쌀을 씻고 불려 밥을 지어 보시라. 그 정성 속에 뜸이 들 동안 당신은 모처럼의 평온을 찾을 것이다.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을 나누는 속에서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이웃은 분명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 받을 것이다. 여유가 되시거든 도시락이나 주먹밥을 만들어 거리로 나가 촛불 든 시민들과 나누어 보시라. 촛불은 더 밝고 더 오래 타오를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기운 차리게 내가 밥 한 번 살게"라는 말이라도 한 번 건네 보시라. 지금은 그 말 한 마디가 그렇게 각별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시기임이 분명하다.
의미없는 사과에 분노하고 끝없는 슬픔에 좌절하기에 앞서 염치있는 인간들끼리 밥을 권하고 밥을 나누자. 우리는 그 모진 인고의 세월을 '밥심'으로 버텨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악착같이!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상현님은 맛칼럼니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