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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체육관 2층에서 찍은 1층 사진. 모여 앉은 유가족들.
진도체육관 2층에서 찍은 1층 사진. 모여 앉은 유가족들. ⓒ 김지은

"봉사는 배식 중심이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다만, 함부로 웃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지난 14일, 진도에 막 도착해 짐을 풀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들은 지침이었다. 당시 수습되지 못한 시신은 12구. 얼마 남지 않은 혈육들이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는 진도체육관은 한산했다.

한때는 기자와 정치인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체육관 입구. 그러나 사고 후 약 60여 일이 지난 그날에는, 도무지 웃을 것 같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의 경찰 한 명씩만이 각 출입구 앞을 지키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전광판 트럭이 서서 월드컵 중계를 24시간 방송한다. "한국 팀 파이팅!" 밝게 웃는 연예인들의 표정도 침묵하는 공기를 일렁이게 만들지 못했다.

체육관 앞의 유일한 소음에 끌려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도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곧 고개를 돌렸다. 막 발 딛은 현실과 뉴스 사이의 경계를 실감한 후, 봉사가 끝날 때까지 그 거대 전광판을 바라본 적은 없다.

 팽목항.
팽목항. ⓒ 김지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유가족과 기타 진도의 봉사자들을 위한 식사 준비가 주 업무였다. 함께 온 봉사자들과는 파를 다듬고 닭고기를 찢으며 금방 말을 텄다. 진도 봉사가 처음이 아니라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잘게 찢긴 고기에 양념을 넣어 무치는 중에 토막대화까지 한 숟갈 버무려진다.

"진도 쪽은 이거 빨리 해결되고 치우길 바라는 눈치더라고. 하긴 왜 아니겠어. 지역 이미지도 그렇고, 머리 아픈 일 천지일 텐데."

한 아주머니가 예민할 수 있는 내용의 수다를 털어내자 나머지 봉사자들은 묵묵히 작업에 몰두한다. 아주머니는 아까 체육관에 설치된 시민 기록 단체에서 한 마디 부탁하러 왔지만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런 걸 왜 기록해. 뭐 좋은 일이라고."

이 한마디가 요리 총괄을 담당하는 주방장 할아버지의 귀에 꽂힌 모양이다. 사고가 터진 후 내내 진도에서 유가족들을 위한 요리를 하셨다는 분이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붉힌 아주머니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셨다.

"여 봐요, 모든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해야 이런 일이 다시 안 일어나는 겁니다. 전부 다 기록해야 해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요."

주방장 할아버지가 흥분해서 흔들어 대는 국자에 햇살이 반사됐다. 반짝. 눈이 부셨다.

유가족이 식판 잡으실 땐 나도 모르게 긴장...

 팽목항에 놓인, 세월호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자리.
팽목항에 놓인, 세월호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자리. ⓒ 김지은

"삼선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오면 유가족 분들이라고 생각하면 돼."

옆에서 국을 배식하시던 아저씨가 속삭였다. 식사하러 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봉사자들이다. 군인, 약사, 안마사, 봉사단, 스님. 그리고 간혹 유가족이 섞인다. 두 달간 체육관에 머물면 옷매무새는 실용의 기능에 집중되고, 유행과 패션은 잊히기 마련이다.

삼선 슬리퍼로 대표되는 유가족분들이 식판을 잡으실 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정작 음식을 퍼드리며 대면한 얼굴들은 그저 누구나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였다. 길에서 우리가 흔히 마주치곤 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으레 인사 드리곤 하는, 그리고 우리 집에 가면 계시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평범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가정을 잃은 유가족들.

그 분들은 "밥이 너무 많네요. 조금만 주세요"라고 배식 때마다 습관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봉사자 테이블과 유가족 테이블을 나눠 놓은 식당의 경계 너머에서 조용히 식사하셨다. 가끔은 우셨고, 가끔은 웃으셨다.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체육관으로 돌아가신다.  

진도의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모든 봉사가 끝나고 산책 삼아 걸어 본 외부의 길은 가로등이 거의 없어 눈이 멀어버린 듯 캄캄했다. 가끔 경찰의 야광봉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겨우 진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정도다.

산책에서 돌아와 샤워실을 찾았지만, 두 군데 있는 샤워실은 공사중 혹은 문이 닫혀 있었다. 모두가 돌아가 버리고 자신들만 남겨질까 봐, 봉사자들을 붙잡고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거듭 물어보더라는 유가족들 이야기를 낮에 들은 게 떠올랐다.

시신이 하나하나 인양될 때마다 마지막 시신이 자신의 가족일까 불안해한다는 얘기도. 봉사하는 동안 봤던 기자들은 겨우 서너 명이다. 몸을 씻을 공간조차 차단되어 가는 이 한적함은 하루하루 유가족들을 초조하게 할 것이다.

씻는 일은 포기하고, 잠을 청하려고 체육관 2층에 담요를 깔았다. 1층에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뉴스를 켜놓은 채 삼삼오오 모여 먹고 마시고 대화 중인 유가족들이 보였다. 낮에 체육관에 들어왔을 때는 그 분들이 자고 있었던 걸 미루어 보아,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자는 일도 많은 듯하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밤. 진도 체육관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리고 멈춘 시간과 함께 잊힐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날(15일) 오전과 오후 봉사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봉사자들과 팽목항에 들렀다. 시신을 인양하지 못한 지 일 주일이 흘렀을 때라, 팽목항은 체육관보다 더 한산했다. 뜨거운 태양 밑을 오래도록 걸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리본들을 잡고 거기 쓰인 글귀들을 읽었다. 감정적 수사는 없지만, 그래서 더 애끓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씌여 있다.

"바람이 되어 돌아오라."

슬픔을 전시해둔 것 같은 공간에서, 관람객이 되어 훌쩍이는 일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읽은 글귀가 생각났다.

"적극적으로 돕지 못할 것 같으면, 남의 불행에 가슴 아프다 눈물 흘리는 것으로 네 양심이 선하다는 것을 확인하려 들지 마라."

여전히 방관자가 된 느낌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탔다. 적극적으로 하고자 나선 일마저도 자기만족으로 느껴진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이 출처 없는 마음의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날 밤은, 누군가를 악몽에 내버려두고 홀로 빠져나온 느낌이 들어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아직 유기되지 않은 실종 학생을 위한 리본. 바다를 등지고 항구를 향해 놓인 신발은 '돌아오라'는 의미.
아직 유기되지 않은 실종 학생을 위한 리본. 바다를 등지고 항구를 향해 놓인 신발은 '돌아오라'는 의미. ⓒ 김지은



#세월호#봉사#유가족#진도#팽목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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