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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하순 어느 금요일. 51세 사무직 노동자인 남편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을 열었다. 출근길에 재수하는 큰아들을 학원 앞에 내려주고, 서울의 동서로 길게 난 올림픽도로를 타고 회사에 출근해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켜 일과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사장이 부르기 전까지는.

오전이 다 가기 전, (고용된) 사장은 남편을 불러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오늘 부로 일에서 손 떼세요."

사유는 '노조가 설립되도록 방만하게 관리한 책임'이라 했다. 여태 노조설립과 관련해 어떠한 언질도 없었던 회사였다. 또한 노조설립 과정에 노사 간 불미스런 불협화음도 없었고 당연히 사측도 승인한 노조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책임을 지라니. 사실상 강제 해고였다.  

60세까지 회사 다닌다던 그, 돌연...

 "오늘 부로 일에서 손을 떼시오!"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 부로 일에서 손을 떼시오!"라는 말을 들었다. ⓒ 오마이뉴스

그 다음날 아침, 남편은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둘 거라는 말을 던졌다. 남편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최근 사직이나 이직에 관한 말을 한 적이 없는 데다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60세까지는 무난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라고 말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겠다니. 분명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어떤 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것은 빗나가지 않았다.

남편이 짐을 챙기러 회사에 간 동안 아이들에게 조용히 상황을 설명했다. 납득할 상황이 아니긴 하지만 아빠의 실직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고 아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거짓말~!"이라고 웃으며 받아들이다가는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가는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이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아들이기 위한 어떤 무언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만에 벌어진 이 상황을 누구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짐을 챙기고 돌아온 남편은 전날에 벌어진 상황을 담담히 전했다. 그는 말을 아꼈고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남편이 60세까지는 무난하게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말할 때 나는 속으로 그것을 의심하였다. 남편의 쓸모가 다해지면 언제 어떻게든 버려질 것이라고. 그렇에 짐작했어도 그날은, 도둑처럼 들이닥쳤다.

"엄마는 노후 준비를 어떻게 해?"

불과 몇 주 전, 고등학생인 딸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는 모르는 척 "노후 준비가 뭐냐"고 되물었다. 딸은 "그러니까... 아빠가 회사를 그만 두면..."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딸의 진지한 질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노후준비라는 거 안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써주는 데가 없는데 나이 더 들어 육십 넘어 무슨 힘과 능력이 있어 일하느냐고 했다. 미래 세대를 재생산하고 또 젊은 시절 열심히 노동했으면 노후는 국가가 책임져 주어야 한다고 한 발 더 나갔다. 아이는 "현실이 어디 그러느냐" 했고, 나는 "그래서 이런 체제를 바꾸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누군가 노후를 어떻게 설계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내 노후설계는 이 체제를 바꾸는 데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해고 소식을 듣고 나니, 나는 노후가 아니라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러 생각을 해야 했다. 재산이라고는 낡고 오래된 집 하나가 전부, 물론 이 집이라도 있어 전세금 인상이나 애들 넷 데리고 이사 다닐 걱정은 하지 않았다. 수입은 노후를 준비할 만큼 넉넉하진 않았지만, 한 달 벌어 한 달 살 수 있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갑자기 일자리를 잃으니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다가왔다.  

교육비가 가장 많이 나가니까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대책도 아닌 것을 대책이라고 가장 먼저 떠올렸고, 전업주부로 살아왔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있는 대로 나열해 보았다. 오래전에 일을 그만두었으니 경력이랄 것도 없고 나이도 많아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었다. 식당종업원, 빌딩청소원, 콜센터상담원, 가사도우미, 건설현장 노동 잡부, 베이비시터, 대형마트 계산원, 보험 판매원... 그것도 건강을 전제하고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러나 그만큼 불안정한 일자리들이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 그만 떠나라

남편과 나는 1980년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 남편은 공부를 잘했다. 학문의 길을 가는가 싶었는데 그는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는 돌연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을 선택했다. 당시 대학 졸업자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남편 또한 어렵지 않게 사회의 문턱을 넘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 출신에 꽤 괜찮은 성적에 성실하고 정직한 그의 성품은 그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모두 가산점으로 작용했다.

남편은 20여 년 동안 세 차례 이직했으며 직전에는 외국계 기업에서 인사와 교육, 총무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다. 최근 2년 여 동안은 하루 평균 15시간 일을 해야 했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반납한 날도 부지기수였다.

대부분 외국기업들이 무노조 경영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처럼 남편이 다니던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 영업직 사원들을 중심으로 노조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사용주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사용주는 그것을 빌미로 남편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사실상 강제 해고한 것이다. 남편에게 잘못이 있다면, 바보같이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다.

남편은 평소 자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소소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매우 꺼렸다. 행여 그럴 여지가 있을 것 같으면 일찌감치 외면하곤 했는데 이번만은 사안이 달랐다. 어떠한 실책도 없이 하루아침에 해고자가 될 수는 없었다.

아이들 넷 모두 학업중이라 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고 혼자 벌어 여섯 식구가 먹고 사는데, 이 상황에서 해고란 그야말로 살인적 행위였다. 우리 가족은 얼마 안 가 빚더미에 앉을 게 뻔했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하든, 사측에 직접 보상을 청구하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남편에게 은근 소송을 권유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막연했겠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에 남편은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사실 남편이 그 벽을 높게 보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직한 남편, 아빠가 되어 아내와 자식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을지 모른다. 

 지금, 아이들 넷이 모두 학업 중이라 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때이고 혼자 벌어 여섯 식구가 먹고 사는데, 이 상황에서 해고란 그야말로 살인적 행위였다.  (자료사진)
지금, 아이들 넷이 모두 학업 중이라 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때이고 혼자 벌어 여섯 식구가 먹고 사는데, 이 상황에서 해고란 그야말로 살인적 행위였다. (자료사진) ⓒ 심명남

그는 회사에 1년치 임금을 보상안으로 내놓았고, 회사는 전례 없음을 핑계로 6개월치 조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는 동안 남편의 부당해고에 동료 노동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사측은 일주일도 안 되어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얄팍한 술수였다. 동일한 사용주가 설립한 그러나 별개의 기업체로의 자리 이동이었다. 동일한 보수와 동일한 직책을 보장한다고 하였으나 남편에게 맡겨진 업무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사측은 외견상 해고를 철회하고 새로운 직책을 보장하는 것 같은 카드를 던져 자기 합리화를 완성했다. 그들은 이제 오히려 여유를 부리며 남편의 결정을 기다렸다. 쉰 살이 넘은 남편은 경력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 나이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그가 타진해 본 현실은 냉엄했다. 남편은 사측의 속내를 알면서도 이 카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자존심에 상처가 난 건 사실이고..."

남편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말했다. 사측의 교활한 술책보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상처 난 자존심보다 당장 내일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는 게 남편에겐 우선이었다. 결국 남편은 임금에 합의하고 2년 계약직으로 회사와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

어쨌든 남편은 새로운 회사와 2년 계약을 했고 8월부터 새로운 업무를 한다. 업무 내용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라 한다. 지금에 와서 그것이 어떤 위로가 될까. 어차피 같은 사용주의 다른 회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 어떤 걸 빌미로 다시 횡포를 부릴지 모른다. 

지금 남편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씁쓸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매 주말이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아 나에게 잔소리를 듣던 그는, 어찌 되었든 24시간을 온전히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된 지금 오히려 텔레비전 앞에 앉지 않는다.

그는 작은 공간에 틀어박혀 나무 분진을 먹어가며 뭔가를 만든다고 뚝딱거리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당한 자신의 처지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열중하는지 모르겠다. "평생에 이런 휴가를 보낼 기회가 어디 있겠어, 푹 쉬어"라고 나 또한 그렇게 남 일처럼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어느 토요일이나 일요일인 양, 게으름을 있는 대로 부리는 그런 날쯤으로 여겼다. 남편이나 나나 아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꺼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도 멈춰서야 비로소 보이기 마련이라고, 하루 15시간 가깝게 일을 하면서 남편은 자신이 쳇바퀴에서 돌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하순 어느 금요일 아침, 남편의 쳇바퀴는 오전이 다 가기 전에 외부의 힘에 강제로 멈춰 섰고 그는 거기에서 끌려 내려와야 했다.

어지러움과 갈팡질팡도 잠시, 그는 다시 다른 쳇바퀴로 옮겨 타게 되었다. 그의 쳇바퀴는 얼마나 굴러갈까. 얼마나 안전할까. 그리고 그 안에 남편은 예전과 같을까 다를까. 알 수가 없다. 나는 며칠 뒤, 일에 복귀하는 그를 위해 그동안 내팽개쳐 두었던 와이셔츠를 다리고 얼마 전에 사 두었던 남편의 옷들을 손질해 두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 본 원고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정세와노동> 103호(2014년 7,8월 합본호)에 투고한 글을 보완한 것입니다.



#해고는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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