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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명 가량 남은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는 상봉 때마다 반짝 관심을 받다가 금방 잊히기를 수년째 반복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종전 이후 완전히 가족과 헤어지게 된 수백만 명의 사연은 지난 60년간 대부분 사망하며 소리 없이 묻혀 갔고, 남은 이들도 매년 수천 명씩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기억.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를 5편 연속 내러티브 형식으로 생생히 되살려 본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처럼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이 가족의 사연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기자의 말

[첫 기사: "아빠, 이제 평양에서 제사음식 맛나게 드세요" ]
[둘째 기사: "이웃에게 빌린 그 돈, 평생 후회로 남았다"]
[셋째 기사: "부엉이가 울면 어머니는 잠들지 못했다"]

1970년 평양시

작은 아파트 창 밖으로 보이는 추석 보름달이 둥실하다. 벌써 45세가 된 수덕은 몇십 년째 가족들 없이 보내는 명절이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세월이 지날수록 가슴은 더 쓸쓸하기만 하다.

고향의 가족들과 헤어진 지 거의 30년이 됐다. 할머니, 엄마, 아빠, 동생들의 얼굴조차 이제는 가물거린다. 만날 수 없다는 것보다 이제는 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더 서글픈 나이가 되어 버렸다. 왜 이렇게 됐는지, 왜 다시 만날 수 없는지 묻는 것도 이제 지겨울 만큼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버렸다.

그동안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광복 이후 공산당에도 가입했고 당에서 보내주는 학교에서 공부도 했다. 똑똑했던 수덕씨는 윗사람들의 눈에 들어 농업성의 농업 담당 공무원이 되었다. 참한 여자와 결혼도 하고 아들 하나, 딸 넷도 낳았다. 평양에 작은 아파트도 생겼다. 어릴 적 내줄리를 떠나 곰팡이 낀 콩과 소금국으로 연명하던 17세 소년이 원하던 꿈 그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수덕씨 곁에는 꿈을 이룬 그를 자랑스럽게 바라봐 줄 부모님도, 동생들도 없다.

어린 아이들이 추석 때 "아빠, 우리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요? 명절에는 왜 아무것도 안 해? 삼촌과 고모는 어디 있어?" 하고 묻곤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늘을 올라다 보며 "저 보름달 안에 있단다..." 하고 씁쓸하게 말하곤 했다.

만날 거라는 희망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점점 빛이 바래갔다. '어쩌면 전쟁 중에 다 죽었는지도 모르지. 꿈에 그리는 내줄리 고향도 전쟁통에 폭격을 맞아 다 없어졌을 수도 있어.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마 다 돌아가셨겠지.' 가슴 속 체념의 무게는 납처럼 무거웠다. 부모님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기일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수덕씨의 소원은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제삿날을 알게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김수덕 할아버지 (중앙) 이 남쪽의 가족들에게 보낸 가족사진
김수덕 할아버지 (중앙) 이 남쪽의 가족들에게 보낸 가족사진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2001년 영주시 안정면

큰오빠가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내줄리 고향집은 그대로였다. 사라진 큰형을 대신해 장남이 된 팔성씨는 다른 집들이 슬레이트 개량집으로 바뀌어도 고집스레 옛 모습 그대로 남겨놓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 큰 형이 돌아오면 금세 알아볼 수 있게... 순옥씨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여섯 낳는 동안 고향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부산으로 흩어진 가족들은 명절마다 내줄리로 돌아왔다. 가끔 큰오빠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

2001년 봄, 갑자기 적십자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집으로 날아온 하얀 편지 한 장과 난초 화환, 가족사진 한 장. 수덕씨였다. 분단 후 최초로 이루어진 이산가족 서신교환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내려 온 300통의 편지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들아"로 시작하는 수덕씨의 편지. 나는 잘 있다고, 동생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둘째 팔성씨부터 다섯째 막내 순조씨까지 돌아가며 종이가 누레지고 구석이 닳아 접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자리에 새 살이 돋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갑자기 살아온 수덕씨를 만나는 것은 온 가족의 숙원이 되었다. 당장 둘째 팔성 오빠를 대표로 이산가족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금방 만나게 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 후 13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열 여섯 번의 상봉행사가 열리는 동안 가족들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순옥씨가 어두운 거실에 앉아 멍하니 TV 뉴스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껴안고 흐느끼는 이산가족의 얼굴 속에서 할머니, 엄마, 아빠, 큰오빠가 보였다. 결국 팔성씨는 형을 보지 못하고 2007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상봉의 책임은 셋째 창덕씨에게로 내려왔다. 형이 사 줬던 호루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던 장난꾸러기 열두 살 소년은 이제 70대 노인이 됐다. 이북의 형님을 만나겠다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모아 매달 은행에 저금하곤 했는데, 결국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창덕씨도 2011년에 죽었다.

장손 손자를 그렇게 귀여워 했던 음식 솜씨 좋으신 할머니도, 장날만 되면 술에 취해 큰아들을 찾았던 아버지도, 밤마다 속절없이 베틀 앞에 앉아 영주행 기차 소리만 기다렸던 어머니도, 평생 형을 대신해 맏아들 노릇을 했던 둘째 오빠도, 어린 시절 형이 사준 호루라기를 평생 기억했던 셋째 오빠도 다 죽었다.

남은 건 이제 가물가물한 첫째 오빠의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78살 막내 여동생뿐이었다. 그리고 2013년 9월, 13년을 기다린 전화 한 통. 70년을 거쳐,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쳐 둘째 오빠, 이어서 셋째 오빠, 그리고 첫째 오빠를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인 첫째 딸에게로 흘러온 온 가족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2014년 2월 금강산... "그래도 다행이야"

"오빠, 오빠."

순옥씨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들어 오빠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오빠는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나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팔성이랑 창덕이는?" 

오빠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팔성오빠는 돌아가신 지 한참 됐고 셋째 오빠는 제사 두 번 지냈어요..."

순옥씨가 말하자, 오빠는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한 오촌 당숙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물었다.  대답은 똑같았다.

"아이고 오빠, 다 돌아가셨어요..."

둘 다 말끝을 흐린 채 손만 어루만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2014년 2월 금강산 이산가족상봉에서의 수덕씨 (가운데) 와 순옥씨 (왼쪽 보라색 상의)
2014년 2월 금강산 이산가족상봉에서의 수덕씨 (가운데) 와 순옥씨 (왼쪽 보라색 상의)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오빠는 주머니에서 볼펜과 작은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초가집, 할아버지가 뒤뜰에 심어 주셨던 배나무, 앵두나무, 어머니가 밤마다 하염없이 베틀을 돌리던 사랑방, 가을이면 아버지가 곡식을 찧던 마당의 디딜방아를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렸다. 혹여 기억이 날아갈세라 지난 70년 동안 방안에서 정성스레 그려왔던 것처럼.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115살이시고, 어머니는 113살이셨을 건데..."

오빠가 나직하게 말하자 세 자매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랬었나?' 거의 50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은 순옥씨와 두 동생에게는 흐려져 가는 과거의 기억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했고,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산소는 본 적도 없고, 제사 한 번 드려 보지 못한 오빠에게 부모님의 존재는 아직도 매일 복기하는 간절한 '현재'였다. 그에게는 70년의 한을 풀 최소한의 끝맺음이 필요했다. 

"종이를 가져와라. 부모님 기일을 적어놔야지."

오빠가 말했다. 순옥씨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인 10월 초 닷샛날, 4월 3일을 꾹꾹 눌러 적었다. 오빠는 종이를 양복 주머니 속에 천천히 깊숙이 찔러 넣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평생 소원을 풀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70년간 꿈꿔왔던 만남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한 80대 노부부는 60년 만에 만났지만 귀가 들리지 않아 앞만 바라본 채 어색한 침묵만 이어갔다. 남쪽에서 같이 나온 아들이 어색하게 "서로 이야기를 하셔야죠" 했지만 긴 시간의 수많은 사연을 나누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음을 아는지 서로의 눈은 다른 곳만 응시할 뿐 말이 없다.

몇몇 북에서 온 가족들은 '위대한 당과 장군님의 업적'에 대해 쉼없이 이야기했다. "위대한 장군님이 인민들 속에 들어가서 험한 길을 가고 있는데...그걸 몰라서야 되겠나"라고 한 여자가 소리치자 남쪽 가족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입으로만 웃었다. 남쪽에서 나온 한 여자는 북에서 나온 조카를 붙잡고 "인간은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몇 십여 년을 충실한 당원으로 살아온 수덕씨와 매주 일요일 교회 예배를 빠지지 않는 순옥씨는 서로 손을 그러잡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도 쉴새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어색하게 침묵을 지키는 가족들, 당의 업적과 주님의 은혜를 외치는 이들, 분주히 오가며 접시를 나르는 젊은 북한 종업원들,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 살피는 기자들, 테이블 사이를 그림자처럼 조용히 오가는 검은 양복의 북한 사람들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의 마음은 1942년 영주 내줄리에 가있었다. 

두 시간의 상봉이 끝나고 순옥씨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오빠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2001년부터 다시 만나는 꿈을 수 없이 꿨다. 지금도 꿈은 아니겠지.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정신을 차리려는데 갑자기 화장실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열려 있는 화장실 빈 칸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중년 여자 한 명이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께를 연신 주먹으로 치고 있다.

"오지 말 걸 그랬어..."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가족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고 변해 있었단다. 60년 전의 해사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한겨울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얇은 한복 아래 검게 탄 손마디가 툭툭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만나지 말 걸 그랬어..."

눈물에 젖은 뺨을 연신 손으로 훔치는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 순옥씨는 조용히 화장실을 떠났다. 그날 밤, 순옥씨는 호텔방 침대에 옆으로 누워 어두운 창문 너머 쌓인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도로 양 쪽으로 사람 키만큼 쌓인 눈 위로 또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있다. 문득 순옥씨는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그래도 다행이야..."

순옥씨는 이내 혼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4월부터 기자가 김순옥씨와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김순옥씨의 오빠 김수덕 할아버지의 에세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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