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늘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인문대 사회대를 지나 사범대 뒤편 넓은 공터가 하나 있었다. 건물 뒤로 이어진 둔턱을 계단 삼아 언덕 위로 올라서면 아까는 보이지 않던 빈 벌판이 나타난다. 축구장 크기로 일단 눈이 시원하고 가슴이 확 펴지는 게 마음이 뻥 뚫렸다.
전이 넓어 펑퍼짐하고 우묵한 접시 같은 땅. 산 아랫자락에서 시작한 학교 건물이 본격적으로 산과 만나기 직전의 구릉이었다. 잔디같은 키 작은 풀이 '낮은 포복으로' 기고 중간에 띄엄띄엄 심어진 은행나무도 있고 둘레엔 버드나무도 줄지어 있어 결코 야생스럽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싱그러운 곳이 있다는 게 어디야. 성소 같았다.
옹벽 같은 시멘트 강의동이 중앙을 향하는 사방으로 둘러서 있었다.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새. 은근한 일률 강요. 강의마다 이해부득인 논리와 해석들이 넘쳐났다. 뇌용량 부족을 감지하고 의기소침. 일찌감치 나가떨어졌다.
들어도 멍~하고 읽고 나면, 그래서 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싶던 갖가지 학설. 그나마 강의가 많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1980년대초. 부당하게도 걸핏하면 휴강이었고, 수업거부 결의도 이어졌다. 선배들의 '과 학회'가 빈 강의실에서 더 자주 길게 있었다.
또 이리저리 어지럽게 꺾인 골목을 돌아가야 당도하는 담벼락 사이 작은 방, 뿌연 연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언더'라는 이름의 의식화 세례도 있었다. 새로 눈뜸과 일신에 대한 두려움. 동기와 선배들이 어깨를 걸고 앞으로 전진할 때 후방에서 돌멩이를 건넸다는 정도의 변변치 않은 영웅담 하나 없는 그 때. 양쪽 어디도 아니고 다른 쪽이 있는지도 아직 모른 채 웅숭그런 벌판을 쏘다녔다고 뭐 그리 타박할 일일까.
왜 맨날 그렇게 둥글게 앉았었나 모르겠다. 모이거나 흩어지거나 그저 대형없이 앉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기타도 치고 해방가도 부르고. 베개 말고 원서의 사용처는 뭘까 피식대기도 하고. 바람을 쫒아 냅다 뛰기도. 정경유착 단막극 연습으로 핏대 세운 후 벌건 얼굴로 들이켰던 사치스런 맥주 한 모금.
고등학교 후배 하나는 지난주 군대 끌려갔다더라는 전언. 문무대 입소 동기들에게 보내는 의미없는 편지. 과대표를 두고 벌인 선배 둘의 피 튀기는 설전 방청 후 몰래 나눴던 뒷말. 하늘 아래 두 태양은 없다. 그 옷차림새가 한 달 치 여공월급보다 더 드는 건 생각해 봤냐는 질책. 점심 먹으러 갔다 오자. 니네 남자애들은 음대식당 가냐, 그 멀리? 그럼, 니네 여자애들은 공대식당 갔다 오든가~
그날도 과동기들끼리 모여 하릴없이 놀고 있었다. 낮부터 놀기 시작한 것이 해거름도 금세 불빛도 없는 터에 건너편 얼굴들이 보일까 말까 해서 그만 파하려던 참인데 한 녀석이(나이는 한둘 많았던 것 같다) 잠깐만 기다리라며 우릴 주저앉혔다.
그리곤 여자친구를 데려와 '애인'이라며 조심스레 소개했다. 뭐라? 세상에! 시대가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한가롭게 사랑을? 마치 배신 배반 변절이나 한 것 마냥 한바탕 질타와 구박을 퍼부었다. 결국 둘이 같이 노래 하나 부르는 걸로 면죄 판결을 내렸다.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사랑은 불빛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 정태춘 박은옥의 촛불누구도 '나를 버리신 내 님' 이야기를 둘이 함께 불렀다는 걸 어색해 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불을 밝혀 밤이 다 가도록 어둠을 지키겠다는데. 다시 찾아 돌아올 그대를 믿고 창가에 촛불을 밝히겠다는데. 그거면 됐다.
드물게 히트한 듀엣곡으로 '서정성 짙고 저항성 가득한 음색'. 오히려 그 자리 그 분위기에 딱 이었다. 둘의 주고받음도 부럽게 들리고. 마지막은 다들 자기 목청껏 불러제꼈다. 각자의 기분에 휩싸여. 급기야 입맞춤 '공연'까지 보고야 말았다는 걸 덧붙여야겠다. 두 사람에게 강요됐을 약간의 당혹과 민망은, 그 때 이미 어두웠다는 걸로 갈음해주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