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조차 되지 못한 채 '갑'의 횡포를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직자들이다. 우리 세 사람 역시 대학졸업과 함께, 을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예비 을'이 되었다. 바늘구멍 같은 채용시장에서 선택되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었지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수많은 구직과정에서 겪은 부조리와 비인권적인 대우였다. 술자리에서 오고 가던 불평불만은 곧 채용문화를 바꾸기 위한 항목들로 구체화됐다. 우리는 이를 공론화하기로 결정하고, 입법 청원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기사 세 편에 이 과정을 담았다.-기자 말[예비 을의 반란, 구직자 인권법 ①] 예비 을의 사회[예비 을의 반란, 구직자 인권법 ②] 청원, 그리고 그 이후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의 무관심과 무반응국회 상임위원회가 있는 이유는 본회의에 부의(附議)하기에 앞서 그 소관에 속하는 의안, 청원 등을 심사하기 위해서다. 본회의에서는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치기 힘들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췄거나 경험을 가진 위원들이 미리 심의를 거치는 것이다.
'구직자(취준생) 인권법'의 입법 청원을 추진하면서 가장 먼저 접촉하고자 한 국회의원도 노동 관련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위원장 김영주)의 위원들이었다. 12월 13일, 16명의 환노위 소속 국회의원에게 우리가 발의한 구직자 인권법의 내용과 링크, 입법 취지와 청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 등을 자세히 적어 국회사이트에 명시된 각 의원의 메일주소로 메일을 발송했다.
'구직자(취준생)를 보호하는 '구직자 인권법'을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이었다. 국회의원들은 이런 메일을 하루에도 수통씩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의원실의 구성원들이 쉽게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장 먼저 받은 메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받는 사람의 메일 주소에 해당되는 메일 서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의 메일이었다.
메일을 보낸 지 일 주일이 훌쩍 지난 23일 현재, 16명의 환노위 상임위원 중 절반인 8명이 메일을 읽지조차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김영주·이인영·은수미·이석현 의원이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새누리당 권성동·문대성·주영순·최봉홍 의원도 메일을 읽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은수미 의원실은 우리와의 전화통화에서 "기본적으로 모든 메일을 읽고 분류를 한다. 오류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답했다.
평소 노동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실에서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던 것 역시 의외였다. 청원메일을 확인한 국회의원은 새누리당 민현주·양창영·이자스민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우원식·한정애 의원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답장을 보내온 국회의원은 장하나 의원뿐이었다.
'우리'의 역할에 대한 고민하지만 먼저 관심을 가지고 접촉해 온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청원을 DAUM 아고라에 올린 지 하루가 채 안 돼 기사화되면서 의원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12월 12일, 송호창 의원실의 비서관이자 변호사인 이명행 비서관에게서 아고라에 명시된 주소로 메일이 도착했다. "입법 취지에 상당히 공감하며 이미 우리 의원실은 인턴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청년단체와 함께 발의한 바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이 비서관은 "대표발의가 우리일 필요는 없다. 공동발의로라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재선 의원인 민병두 의원실의 노태석 비서관에게도 연락이 왔다. 법학박사이기도 한 노 비서관은 통화에서 "아고라 청원이 올라온 직후, 이미 법제실에 문의하여 위헌 여부 가능성을 알아봤다"며 "이미 존재하는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보완하는 개정과 함께 새로운 법 제정도 추진해야 할 것 같다"며 구체적인 적용 범위와 방향에 대해 상의했다. 난관이 많겠지만 공공기관에만 국한되는 강제력이 아니라 중소기업 이상의 사기업 모두에 적용되는 권고안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모았다.
우리가 보낸 메일을 읽은 나머지 환노위 8명의 의원 중 답변이 온 의원실은 새정치민주연합 장하나 의원실이 유일했다. 장하나 의원실의 이택준 청년정책 비서는 "소위 '취준생'으로 불리는 청년 구직자들의 고통이 잘 드러나는 거 같다"며 "토론회(증언대회)를 비롯해 입법 활동에 더 참여가 가능하거나 의향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마침 아고라 청원을 올린 이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왔던 '청년유니온'이 장하나 의원실과 함께 만날 자리를 주선해 서울 불광동에 위치한 서울시청년일자리허브에서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청원을 처음 올릴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운동'이나 '연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는 소위 얘기하는 운동권이 아니었고, "안녕들하십니까?"의 대자보 행렬이 나부낄 때도 벅찬 마음으로 구경만 했던 '관전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커져 있었다. 국회의 입법과정에는 수많은 고비가 있을 것이었고, 기업의 인사권과 자유를 일정 부분 침해할 소지가 있기에 여론 형성도 중요할 것이었다. 그간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등에 적극적 운동을 벌여온 청년유니온의 정준영 정책국장은 다양한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효성 있는 구직자 인권법의 제정을 위해 기꺼이 나서기로 했다.
일부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취업포털사이트인 인크루트가 우리가 제시한 구직자 인권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20대 회원 579명 중 97.6%가 구직자 인권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반면 기업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합격할 경우 '입사하겠다'는 응답자 역시 79.3%에 달했다.
채용과정에서 만연한 비인권적 처사에 쉽게 대응할 수 없는 취업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결과다. 개인이 대응할 수 없는 부조리는 제도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의 요청에 일제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응답 역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