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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조차 되지 못한 채 '갑'의 횡포를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직자들이다. 우리 세 사람 역시 대학졸업과 함께, 을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예비 을'이 되었다. 바늘구멍 같은 채용시장에서 선택되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었지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수많은 구직과정에서 겪은 부조리와 비인권적인 대우였다. 술자리에서 오고 가던 불평불만은 곧 채용문화를 바꾸기 위한 항목들로 구체화됐다. 우리는 이를 공론화하기로 결정하고, 입법 청원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기사 세 편에 이 과정을 담았다.-기자 말

 다음 아고라 청원 게시판에 올린 '구직자 인권법' 청원 페이지. 보름동안 1254명이 서명했다.
다음 아고라 청원 게시판에 올린 '구직자 인권법' 청원 페이지. 보름동안 1254명이 서명했다. ⓒ 화면캡처

[예비 을의 반란, 구직자 인권법 ①] 예비 을의 사회

'구직자 인권법'을 만들다

노동자는 노동기본법에 의해 여러 가지 권리들을 가진다. 그리고 그 권리가 침해당했을 경우 보호받을 수 있는 절차도 법에 명기돼 있다. 그러나 '예비 노동자'를 위한 법은 없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들은 심각한 인권침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필자들이 '구직자 인권법(가칭)' 청원을 요구하게 된 이유다.

이 법을 통해 구직자라는 이름 하에 어디까지 자신을 내어놓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동시에 구인자는 구직자에게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지도 명확해졌으면 했다. 필자들이 주장하는 '구직자 인권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직무와 직결되지 않는 개인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수집할 경우 이유를 명기해야 한다.
② 채용공고 시 모집하는 지원분야와 직무소개를 정확히 공고해야 한다.
③ 합격 발표·면접 등 전형의 날짜와 시간을 미리 공지해야 한다.
④ 전형의 일정 단계 이상부터는 면접 참가자들에게 회사의 초봉을 알려줘야 한다.
⑤ 불합격자는 합격자와 동일한 방법으로 공지해야 한다.
⑥ 최종탈락자의 경우 탈락이유를 한 문장 이상 설명해줘야 한다.
⑦ 다음과 같은 질문을 면접관이 지원자에게 하는 것을 금지한다.
⑧ 면접비는 반드시 지급한다. 최저임금처럼 최저면접비도 두도록 한다.

'구직자 인권법'의 도입 취지와 자세한 내용 전문은 다음(Daum) 아고라 청원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는 너는 합격했느냐는 말들에 대하여

'구직자 인권법'을 가장 먼저 선보인 곳은 지난 11월 15일, 한 대학의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익명으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다는 취업 관련 게시판에 관련 내용을 올렸다. 취업 준비생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였다. 이틀 만에 71개의 댓글이 달렸다. 대개는 응원하는 글이었지만, 부정적인 댓글도 적지 않았다. 아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댓글 중 일부다.

"쓸모없는 데다 힘쓰시네. 이번에 취업하셨어요?"
"솔직히 '전탈자(지원한 회사에 전부 탈락한 사람을 부르는 말)'의 징징거림 같네요."
"사람 뽑는 것도 맘대로 못하면 그게 기업임? 불만이면 그 기업을 안 쓰면 될 거 아닌가요?"
"이런 사람들이 노조 가입함. 면접에서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닌 척. 탈락 이유는 이런 데서 나오는 거죠."

구인자(기업)는 구직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구직자가 스스로를 증명해 낼 것을 요구한다. 민감한 개인정보, 압박스러운 면접도 그런 증명을 위한 과정이라 믿는다.

반면 구직자는 구인자(기업)를 이해하려 한다. 나아가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구직자가 받는 부당한 대우'라는 문제의 본질보다, '이런 제안을 하는 사람의 취업 여부'라는 성과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신기주의 사회비평칼럼집 <우리는 왜>에는 왜 청년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글귀가 있다.

"기업사회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기업의 논리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세상이다. 효율성과 성과를 최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을 내면화시키고 그러다 보면 대기업을 두둔하게 된다. 우리가 기업처럼 생각하는 한 정부는 기업을 이길 수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다음 아고라 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것은 12월 7일의 일이다. 바로 다음 날 <아시아경제>에 <기업 채용 불합격자도 '인권있소'>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왔다. 기업들의 채용공고가 불명확해 '깜깜이 채용문화'가 생겨났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덧붙었다. 그 다음 날인 9일에는 <문화일보>에 <취업준비생들 "구직자 인권법 만들자">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청원을 지지하는 서명자들의 반응도 함께 실었다.

10일에는 <위키트리>에서, 15일에는 <한겨레>에서 이를 기사화했다. 언론에 알려지자 서명에 참가하는 인원 수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한수진의 SBS전망대>에서는 <한겨레> 기사를 봤다며 인터뷰 요청을 해오기도 했다.

취업 포털 사이트인 <인크루트>에서는 구직자 인권법의 필요 여부를 설문조사하기도 했다. 22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97.6%가 구직자 인권법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아주경제>와 <파이낸셜 타임스>, <아크로팬>은 이를 기사화했다. 구직자 인권법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대학생이 쓴 칼럼을 실은 <디지털 타임스>까지 포함하면, '구직자 인권법'에 관심을 보인 언론사는 9곳에 달한다.

언론사뿐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등에서도 주목받았다. 이 사이트에는 10일 구직자 인권법 청원을 소개하는 글이 올라왔고, 22일 현재까지 1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글을 조회했으며 377개의 추천을 받았다. 이제 검색 사이트 네이버에 '구직자'를 입력하면, '구직자 인권법'이 자동 완성된다. 청원 글을 올린 후 2주 동안 얻은 쾌거였다.

온라인 서명에는 23일 오후 5시 현재 1252명이 참여했다. 55개의 의견도 달렸다. 그 중에는 구직자뿐 아니라 구인자의 목소리도 있었다. 다음 아이디 'slow*****'는 "나도 소규모 업체를 하는 사람이지만 이건 정말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창 구직활동을 하는 청년층이 아닌, 장년층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0년대는 시험 보러오면 시험장에서 봉투 1개씩 줍니다. 식사비와 차비를 조금 넘게.." 인터넷에 올린 글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회였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글



#구직자인권법#취준생인권법#인권#예비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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