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치맥'을 파는 곳이 없다고? 친구와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양꼬치 집만 이어질 뿐, 치킨 집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남구로역에서 친구를 만나 '치맥'을 즐기려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인지 지하철역 인근 거리는 한국이라기보다 중국에 가까웠다. 중국식당에서부터 은행, 환전소 등 간판 역시 낯선 중국식 한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단번에 우리를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묘한 거리. 그곳에서 친구와 내가 가까스로 찾은 곳은 실내포차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아주머니가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경계보다는 반가움에 가깝다. 아저씨들만 찾는 그곳에 웬 젊은 처자 둘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모든 안주는 만 원, 일단 저렴해서 좋다.
하지만 맛도 보장할 수 있을까? 치킨에 대한 미련을 다 떨치지 못한 채, 우리는 오징어볶음과 밥 두 공기를 시켰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김 나는 밥 위에 오징어를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친구와 나는 동시에 입 꼬리가 올라간다. 오호라. 단번에 치킨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 있을 만큼 맛있다.
'진상' 손님으로부터 아주머니를 구하라!불황을 말해주듯 가게는 한산했다. 손님은 우리까지 합해 고작 두 테이블. 건너편에는 표정이 썩 좋지 않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다. 닭똥집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눈 깜짝할 새 비워버린 뒤, 주인 아주머니에게 딴죽을 건다.
"인상 참 안 좋아. 아줌마는 왜 이렇게 인상이 안 좋아?"'제발 거울이나 보세요'라는 말을 꾹 삼키며 아주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제가 그래요?"중년치고는 제법 고운 아주머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아줌마는 고향이 어디야?""저 강원도예요.""하하하. 그 먹을 것 없어서 감자랑 옥수수만 먹는 동네! 나는 고향이 충청도야. 양반들 사는 동네!" 아줌마와 나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강렬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물론 눈으로.
'오늘 일진 사납네요!''그러게요. 진상 손님 만나셨네요.'"소주 한 병 더 갖고 오고. 밥도 한 공기 갖다 줘."아무래도 그의 진상은 수위를 더해갈 것만 같았다. 결국 친구와 나는 고민에 빠진다. 자리를 옮길 것인가, 그가 떠나길 기다릴 것인가. 어쩐지 혼자 남겨질 아주머니가 걱정된다. 그 사이 아저씨는 '안주 맛이 별로다'에서부터 '잘 나가던 내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됐을까'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레퍼토리를 풀어냈다.
단지 손님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참아내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자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험한 인상의 아저씨에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주세요'라고 할 용기는 나지 않고, 친구와 나는 소심하게나마 '아줌마 구하기 작전'을 펼쳤다. 일부러 아주머니가 보는 드라마 이야기를 묻는가 하면, 요새 장사가 어떠냐는 둥 아저씨보다 선수를 쳐서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는 식이었다.
'양반'이라던 손님, '먹튀'였다니...우리가 주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 아저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아줌마,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아저씨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아주머니와 우린 뒷담화를 시작했다.
"혼자서 이렇게 장사하시려면 힘들어서 어떡해요?""처음 한 달은 주방에서 내내 울었어요. 근데 어떡해요? 먹고 살아야하니. 사실 저 정도는 뭐 진짜 진상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아주머니의 씁쓸한 미소에 어쩐지 마음이 더 아려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우리의 뒷담화가 5분, 10분이 돼도 아저씨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다.
"혹시 이 사람, 튄 거 아니에요?"아주머니는 당황하지 않고 밖을 살핀다.
"튀었네요.""아이고, 어떡해요?""저런 사람은 그냥 가는 게 나아요. 더 있어봤자 못 받을 돈만 느니까."'먹튀' 아저씨의 술값은 총 1만7000원. 그렇게 아주머니한테 구박을 늘어놓더니 술값까지 내지 않고 가버리다니. 장사가 그리 잘 되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런 진상에게 당한 아주머니를 보고 있노라니 괜한 분노가 치민다.
"뭐 양반이고 잘 나가는 남자 타령하더니 2만 원도 안 되는 돈 먹고 튀냐? 남자가 쩨쩨하게! 허허허."정작 아주머니는 너털웃음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신다. 굉장한 인생의 내공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우리 부모님도 이런 상황들을 견디며 나를 키워냈겠지. 물론 지금의 나 역시 때로는 치욕스러운 순간을 버텨가며 밥벌이를 하고 있을 테지만, 어쩐지 내 불만은 아주머니와 견주기 힘들어 보인다.
"나중에 돈 꼭 받아내셔야 해요."아주머니에게 할 수 있는 위로는 그 말뿐이었다.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마음 부자'를 만났습니다 친구와 나는 안쓰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어림잡아 하루 매출 10만 원, 그 중 진짜 손에 쥐는 돈은 5만 원이나 될까? 그런데 저렇게 '먹고 튀어버리는' 손님이 1명이라도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지 싶다. '먹튀' 손님에 대한 분노 반, 아주머니에 대한 안쓰러움 반으로 돌아온 길을 거슬러 오르니 지하철역이다.
마치 짧은 중국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던 남구로역을 벗어나는 지하철 안. 문득 내가 낸 술값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분명 오징어 볶음과 밥 두 공기에 맥주 두 병을 마셨는데, 2천 원이 빈다. 그제야 나는 아주머니가 밥 두 공기를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내가 만약 1만7000원을 떼였다면 어땠을까? 악착같이 2천 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제는 아무리 비싼 밥집에 가도 밥 한 공기 공짜로 얻어먹기 힘든 세상이다. 헌데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초라한 선술집에서 취객들을 상대하면서도 아주머니는 넉넉한 인심을 간직하고 계셨다. 만약 아주머니가 밥값을 깎아준 걸 알았더라면, 정중히 고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걸 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날 나는 우리 곁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진짜 '마음 부자'를 만났으니 말이다. 이 자리를 빌려 아주머니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건네 본다.
"아주머니, '치맥' 대신 선택한 '오맥'은 정말 최고였어요. 밥 한 공기에 담긴 넉넉한 인심, 잊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