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런 아저씨, 탄 아주머니, 그리고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증적이란 증거와 흔적이라는 뜻이다) 후인 응옥 번 관장 세 분이 한국을 4월 4일부터 4월 10일까지 7일간 방문한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후신인 평화박물관(대표 이해동 목사)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민간인학살 피해지역을 중심으로 의료봉사활동을 해온 평화의료연대,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 아시아평화인권연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성폭력피해자를 지원해 온 정신대대책협의회, 베트남에 평화도서관을 짓고자 하는 호아빈의 리본과 충북민예총 등이 정성을 모아 이 분들을 초청하여 서울, 부산, 대구에서 한국의 시민들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올해가 2015년이니 베트남전이 끝나고 만 40년, 끔찍했던 학살이 있었던 때로부터는 근 5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이다. 이 일은 마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처음 일본 땅을 밟아 일본 사람들과 만나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맹호부대가 지나간 15개 마을에서 1004명 죽어
본명이 응우옌 떤 런인 런 아저씨는 1966년 2월 중순 베트남 중부 빈딘성 따이빈사에서 벌어진 학살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잃었다. 맹호부대가 지나간 인근 15개 마을에서 3일에 걸쳐 1004명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12년 전 내가 처음 베트남을 갔을 때 만난 분이지만, 그가 흑흑 흐느끼는 우리 일행들 앞에서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담담하게 그날의 끔찍했던 일을 말해주던 장면은 내 가슴 속에 너무도 선명히 새겨져 있다. 런 아저씨의 아버지와 형은 해방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뒤였다.
새벽녘에 따이한 병사들은 15살이던 런 아저씨와 어머니와 누이동생 등 세 식구를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누군가가 던진 물체가 런 아저씨의 발에 맞고 굴러가더니 꽝 터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 안이었다. 옆에는 각각 두 다리를 모두 잃은 누이와 어머니가 누워있었다. 동생이 먼저 숨을 거두었고, 네 동생이 죽었나보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동생을 둘둘 거적으로 말아 갔다고 한다.
어머니와 단 둘이 누워있는 방 안, 큰 소리로 울부짖던 어머니의 비명이 점점 가는 신음소리로 변하더니 그마저 끊어져버렸다. 동생을 묻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시 어머니를 거적에 말아 내갔다. 홀로 남은 데다 온 몸에 수류탄 파편이 박혀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은 그를 또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잃은 마을 사람들은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한 1년쯤 지나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런 아저씨는 정글로 가 총을 들었다고 한다(런 아저씨의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 평화의료연대 송필경 전 대표가 자세히 기고한 바 있다.
"한국군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2013년 9월 8일).
15살이던 런 아저씨는 이렇게 한 번씩 한국의 평화기행단을 만나 옛 일을 들려주면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힘들어 하실 터이지만, 그래도 우리를 만났을 때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탄 아주머니는 한국사람 특히 성인 남성 얼굴을 대면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신다. 탄 아주머니는 사건이 터질 때 8살이었다.
2000년 베트남전진실위원회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할 때 우리는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퐁니퐁넛 마을에서 청룡부대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뜻밖에도 학살 직후 현장에 당도한 미군이 찍은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여덟 살 어린 탄은 동생도 잃고 언니도 잃고 자꾸 쏟아져 나오는 창자를 부여잡고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탄 아주머니는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이 사진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탄 아주머니의 배에는 아직도 긴 흉터가 남아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흉터는 배에 남은 상처만이 아닐 것이다(탄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1999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던 <한겨레> 고경태 기자가 최근 펴낸 <1968년 2월 12일>에 자세히 나와 있다).
'증오비'와 '참전 기념비', 같은 전쟁 서로 다른 기억
런 아저씨와 탄 아주머니 일행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나눔의 집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날 예정이다. 1999년과 2000년, 한국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베트남 국민들에 대한 사죄운동이 벌어졌을 때, 여기에 적극 동참하셨던 분들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셨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나 할까, 같은 전쟁 피해자로서, 또한 그 끔찍한 고통을 안고 살아온 생존자로서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제일 먼저 손을 내밀어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 위로의 마음을 전한 분들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셨다. 한시적 연대체였던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로 발전할 수 있도록 과제를 부여하고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신 것도 바로 할머니들이셨다.
나는 우리옷을 곱게 입은 열여섯 꽃다운 소녀들이 농라(베트남 삿갓)를 쓰고 아오자이를 입은 예닐곱 먹은 베트남 아이들을 안고 있는 장면을 꿈꾼다. 비록 땅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서글픈 아시아의 전쟁터에서 마주했지만, 하늘에서만큼은 꼭 그렇게 만났으면 한다.
평화박물관은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방한에 맞추어 4월 7일부터 한 달간 평화박물관의 전시공간인 스페이스99에서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이란 제목으로 이재갑 작가의 사진전을 연다.
이재갑 작가는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 징용, 한국전쟁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이 남긴 또 다른 상처인 혼혈 문제 등에 천착해왔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곳곳의 민간인 학살지에 세워진 초라한 위령비 - 때로는 증오비나 복수비라고도 불린다 - 와 최근 10년 사이에 한국의 곳곳에 우뚝 선 베트남 참전 기념비를 대비시켜 한국과 베트남에서 이 전쟁이 서로 얼마만큼 다르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베트남의 추모비와 한국의 기념비 사이의 거리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물리적 거리 3565Km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멀다. 수많은 베트남 새댁들이 한국으로 시집오고, 베트남에 외가를 둔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지금, 한국과 베트남은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할까.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은 쩐득르엉 당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사과를 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우리 국민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뜻을 표한 바 있다.
2013년 9월 베트남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적군의 수장이었던 호찌민 전 주석의 묘소에 직접 참배하고 또 그의 생가까지 방문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한국에 첫 발을 딛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