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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데이빗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를 영화관에서 일곱 번 봤다. 특별한 경우다. 웬만해서 세 번 이상 보지 않는데. 왜 그랬냐 하면, 핀처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카메라 무빙에 내 마음을 온통 빼앗겼기 때문이다. 반복해 보면서 생각했다.

'아, 핀처는 영화 감독으로 환생한 유클리드구나. 카메라가 어떻게 저렇게 기하학적으로 움직이지' 다른 감독의 카메라라면 조금은 흔들리며 대상을 훑고 양 옆으로 이동할 카메라였다. 핀처의 카메라는 달랐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이 미리 예비해 둔 카메라. 점지해 준 각도와 경로를 파시스트의 정신으로 징그럽게 따라 밟는 극악무도한, 그런 카메라였다. 이 움직임을 입 벌리고 넋 놓고 오줌을 질끔 싸며 일곱 번 본 거다.

근데 다 보고 나서 영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마크 주커버그가 참아주기 힘든 개자식이란 게 기억나고, 친구 왈도 세브린이 주커버그에게 악에 바친 표정으로 소리 치고, 기골이 장대한 쌍둥이 형제가 노를 열심히 젓는 것까지는 봤는데 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 핀처의 카메라 무빙 때문에.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앞표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앞표지 ⓒ 워크룸 프레스

2.

이 책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는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보수적이고 보수적인 교재다. 역자 김형진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게 단점이 될 순 없다. 다만 저자 요스트 요훌리의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미감과 윤리에 근거한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란 걸 지적하고 가는 게 옳겠다.

역자 후기가 더 흥미롭다. 김형진은 타이포그래피가 가독성과 판독성이 아닌 순전히 미적 판단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하지 않는다. 마음을 다해 힘껏 동의하고 싶다.

최성민, 최슬기의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수면 아래 항상 깔려 있음을 느꼈는데, 이럴 경우 타이포그래피는 내용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유리창이 아니다. 타이포그래피는 내용이라는 본체와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우리가 훌륭한 예술에 부여하는 기준을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다. 주관적이면 주관적일수록 좋은 타이포그래피다. 평범한 독자들의 일반 기준과 보편성에 맞춰주는 타이포그래피는 나쁜 타이포그래피다. 일반 독자가 디자이너의 높은 내적 기준과 미감에 부합하도록 채찍질하고 추동하고 자극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좋은 타이포그래피다.

3.

다시 돌아가볼까. 요스트 호훌리가 말하는 가독성과 판독성이나 김형진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나 단단하지 못한 기준인 건 마찬가지다. 가독성이나 판독성도 완벽하게 모두가 합의한 기준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잘 읽는다. 다른 사람은 구별 잘한다. 누구는 그러지 못한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모든 공적인 기준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누군가의 사적 기준이다.

좋다. 어차피 어떤 기준도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면, 무른 땅 위에서 어설프고 오만하게 대중과 공공성을 외치기 보단,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며 '아름다움'을 목표로 지고지순하게 달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이건 완전히 예술가잖아!?

4.

디자이너의 이렇게 크고 높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는가. 디자인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끈적거리는 통념이 있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디자인의 선한 공공성과 진부한 윤리를 계속 물고 들어오며 시비를 걸어올 거다. 때문에 자의식 높은 디자이너는 삼면전을 벌여야 한다. 한쪽은 요구 많은 클라이언트고 다른 한쪽은 미감 없는 대중들이며, 마지막 한쪽은 자기 자신. 즉 예술가로서의 디자이너를 은밀하게 소망하는 자기 자신이다.

5.

핀처의 카메라는 옳다. 여기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 없다. 아름답기에 옳다. 때문에 디자이너도, 옳다.

덧붙이는 글 |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요스트 호훌리 / 김형진 옮김 / 워크룸 프레스 펴냄 / 2015. 01 / 1만2천원)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요스트 호훌리 지음, 김형진 옮김, 워크룸프레스(Workroom)(2015)


#타이포그래피#핀처#소셜 네트워크#데이빗 핀처#요스트 호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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