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인도 최고의 '껄떡 도시'인 카주라호에 2시간 연착해 오전 8시 30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릭샤 왈라들이 우리를 따라붙으며 정신 사납게 껄떡댔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 껄떡 도시군!'릭샤를 타고 버스 스탠드로 이동했다. 카주라호는 반나절 일정으로 잡았기에 버스 스탠드에 있는 간이 기차 매표소에서 사트나(satna)발 바라나시행 오후 7시 20분 기차를 예약했다. 여기에서 곧바로 바라나시로 가는 직통 차편이 없기 때문에 로컬 버스로 사트나까지 3시간을 이동해 그곳에서 바라나시행 기차를 갈아타야만 했다.
서부 사원군 입구 맞은 편에 있는 2층 한식당 테라스에서 식사를 했다. 와우! 된장찌개 맛이 기가 막혔다. 거기에 라볶기의 감칠맛까지…. 그동안 인도에서 맛 본 어느 한식보다 최고의 맛을 선사해줬다.
주인의 아들로 보이는 어린 꼬마 아이가 우리 곁에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주문을 받아 음식을 날라다줬다. 아버지는 요리를 하고 아들은 서빙을 봤다. 아이는 제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으며 우리의 오더 눈빛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멋쩍음에 조금씩 주문을 더하다 보니, 어느새 식탁 가득한 밥상이 차려졌다. 그 아이를 보며 한 시가 떠올랐다.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가 슬며시 곁에 내린다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김사인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것이다.
아무리 이쁘게 얼굴을 꾸미고 화려한 수사로 내 귀를 즐겁게 해줄 지라도 진실로 고마운 것은 소리 없는 존재다. 진정 소중한 것은 존재다. 바라는 것은, 기대하는 것은 너가 아닌 나이다. '널 위한다.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것은 나의 말이다. 나의 것이다. 존재만으로 존재하고, 존재만으로 존재받을 때 우리의 관계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매개된다.
밥을 먹는 동안 게릴라성 소나기가 덮쳤다. 옆에 서 있는 아이와 인도의 작은 마을에 내리는 비가 우연을 가장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 천념만상은 다 내가 만든 삶의 찌꺼기가 돼 버려졌다. 나의 화려한 꽃잎들이 바람에 다 날아갔다. 장자는 자유를 꿈꿨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펄쩍 뛰어올라 넓은 세계로 탈주하기를 꿈꿨고, 물고기가 큰 그릇의 물에서 비상하여 그릇없는 천해(天海)에서 노닐기를 바랐고, 나무에 붙어 사는 한 철 매미가 시공의 틀을 깨고 날아올라 대붕(大鵬)의 소요를 만끽하기를 꿈꿨다.
따지고 보면 장자도 '존재의 삶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누가 그랬던가. '세상은 단순한데 내가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사실을 보면 복잡하지만 진실을 대면하면 단순해진다'라고.
비는 금새 그쳤다. 우리를 위해 야시시한 미투나 조각상(남녀교합상)을 깨끗이 씻어주려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딱 목욕물만큼만 쏟아 부었다.
완전성을 지향하는 수많은 마투나들카주라호에 있는 많은 사원군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서부 사원군이다. 나의 소견일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방문하는 이들 중 다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트처럼 역사적·문화적 가치의 눈으로 조각상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남녀의 적나라한 성교상'인 미투나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왔을 것이다. 그래서 뭇 여행객의 입에 이 도시는 '껄떡 도시'라고 회자되고 있었다.
서부사원군에 입장하고 숨은 그림 찾기처럼 매의 눈으로 에로틱한 미투나 조각상을 찾기 시작했다. 많은 사원 가운데 칸다리아 마하데브 사원의 벽면에 다양한 미투나상이 밀집돼 있었다. 장호는 연신 웃음기 어린 미소로 두 손을 합장한 채 카마수트라를 잠언처럼 반복하였다. 아직 신혼이라서 그런가?
책에서만 보던 미투나를 실제로 보니 '야'하다는 생각보다 '왜, 어떻게 이런 조각상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솔직히 적나라한 남녀의 성교상, 풍만한 가슴과 터질 듯한 엉덩이를 뽐내는 원숙한 여인들, 상상 속에서만 불온하게 생각해 보았던 체위 등은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미투나 속에는 완전성을 꿈꾸는 합일(合一)의 염원이 담겨 있다. 불완전한 남녀는 성(性)을 통해 완전한 하나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느 문화권이든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성을 향한 근원적 지향이 있다. 동양의 음과 양처럼 상반된 기운이 조화를 이루며 우주는 질서 있게 운행이 되고, 남녀는 나와 다른 반쪽을 지향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음양이 만나면 온몸에 전기가 흐르고, 생명이 태어나고, 삶은 환희로 가득차게 된다. 미투나상이 이곳에 새겨진 유래에 대한 많은 설 중에 북인도에 들어온 탄트리즘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탄트리즘은 음과 양, 남과 여, 정신과 육체, 절대자와 피조물의 합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완전성인 해탈로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이다.
미투나상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보면 볼수록 이상야릇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참 어여쁘다. 세상에 인간의 몸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사랑이 성의 감성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에로티시즘은 성의 감각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형적인 이슬람 수염을 한 관리인이 장호에게 접근하더니 미투나상을 하나하나 찾아주며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주었다. 그가 사원을 관리하는 사람인지, 청소하는 사람인지, 단순한 주민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우리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면서도 그가 미투나상을 가리키고 설명을 해 줄 때마다 과장된 희열을 표현하고 역동적인 리액션을 취해줬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의 친절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었다.
모든 미투나 프리젠테이션이 끝났을 때 그는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였다. 역시 '친절한 인도인'을 조심하라는 교훈이 여기에서도 뼈저리게 다가왔다. 작은 돈이 호주머니에서 나오면 얼굴이 일그러졌고, 고액권이 나오면 미투나상을 본 듯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그의 서비스를 맹목적으로 받은 우리 입장에서 어찌 그 요구를 거절할 만한 용기가 있으랴? 항의도 잠시, 장호가 50루피를 찔러줬다. 나보다 여섯 살이 어린 장호는 그랬다.
"형, 그냥 주자. 여기까지 와서 이성적으로 따지지 말고."
그와 어색하게 헤어진 우리는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시바의 링감(성기)을 지켜보는데, 이번에는 청소하는 할머니께서 다가왔다. 또? 우리는 대충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밖으로 나왔다. 역시 입구에서 할머니는 우리에게 똑같은 손을 벌렸다. 불이과(不二過)!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쏘리, 쏘리~" 반복하며 정중하게 손을 외면하고 밖으로 나왔다. 사원에 기대 우리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얼굴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아마도 "요즘 것들은 너무 아는 것이 많은 게 탈이야!"라고 생각했을까?
에로틱하면서도 예술성이 돋보이는 미투나상과 그 외 조각상을 모두 둘러본 후 사트나행 버스를 타러 버스 스탠드로 향했다. 상가에서부터 버스스탠드까지 3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구걸하는 어린 아이 하나를 포함해 세 명의 꼬맹이가 따라붙었다. 종알종알 자기들이 질문을 던지고 알아서 답변을 늘어놓는 요상한 녀석들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들도 똑같이 가이드를 해줬다는 얼토당토한 이유로 돈을 요구했다. 이 어린 녀석들! 자문자답의 진수를 보여주더니, 결국 돈이었군.
정말 이곳은 껄떡 도시이다. 카주라호는 미투나상의 이미지에 따라 남성이 뭇여성에게 껄떡댈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외국인 관광객에게 치근덕거리고 껄떡거리는 끈적 도시였다.
카주라호 버스 스탠드의 시트콤 버스 스탠드에 도착해 의자에 앉아 있으니 여기저기에서 껄떡거리는 현지인들이 모여 들었다. 워낙 껄떡대는 사람에게 당한 상황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들을 대했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너무 가까이하지도 너무 멀리하지도 말라. 그들은 우리를 포위한 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서로 한국말로 무슨 말을 하면 자기들끼리 뭔가에 대해 시끄럽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조용해지면 누군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고 말문이 터진 그들은 또 자기들끼리 토론이 벌였다. 이게 맞다, 이렇게 하면 된다 등등.
난 그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누가 오더니 몇 루피의 사용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일을 본 후 자리로 돌아와 물었다. "여기는 화장실 요금도 받습니까?" 그들 사이에 또 논쟁이 붙었다. '돈을 내야 한다' '아니다' '예전에는 없었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우리 셋은 눈만 깜박거리며 앉아 있고 그들은 새로 던져진 화두를 가지고 열띤 토크쇼를 벌였다.
어떤 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당신의 노랑 점퍼가 멋지다며 한 번 입어볼 수 없겠냐고 했다. 내 옷을 입은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거울삼아 360도 회전쇼를 벌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검은색 가죽점퍼와 바꾸자며 쉽게 벗어주질 않았다. 옷을 벗지 않는 그와 벗으라고 하는 나 사이에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자, 지긋이 나이가 든 분이 빨리 벗어주라며 중재를 해줬다.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내 손에 있는 스마트폰을 툭 치며, 그럼 사진이나 찍자고 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정차된 버스를 배경으로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정류소를 떠나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더니 운전사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운전사는 내 고객의 곁에 서더니, 환히 웃으며 어서 찍으라고 했다. 이 운전수는 도대체 뭐지? 둘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찍어주는데 그 뒤로 버스에 탄 승객들이 모두 우리를 표정 없이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고, 이건 또 뭔 상황이야?
운전기사는 자기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알았다며 당신의 이메일 주소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의 이메일 주소를 적기 위해 볼펜을 찾고 있는데, 그는 시간이 없다며 쓴 웃음을 짓고 그냥 가버렸다. 거북이 같은 내가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까? 나를 버스 앞으로 끌고 온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며 계속 사진을 찍자고 졸라댔다. 그는 나에게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1, 2, 3 Picture~ 1, 2, 3 Send~"를 반복하였다.
즉석 시트콤이 끝나고 오후 3시 반, 시골 소도시를 이어주는 로컬 버스에 탔다. 10루피씩 짐에 대한 추가요금을 내고 버스에 오르자, 현지인들이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차창 밖에서는 가이드 비용을 달라던 그 꼬맹이들이 돈을 달라며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버스는 양쪽으로 각각 2명과 3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으로 되어있는데, 폭이 너무 비좁아 성인 두세 명이 앉기에 매우 불편했다. 비포장도로의 충격이 전해질 때마다 우리는 차에 몸을 맡긴 채 엉덩이를 들썩 들썩거렸다. 인도 방방을 타며 우리는 20여 년 전 시골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추억을 떠올렸다. 우리의 호들갑 떠는 모습에 바로 뒤에 앉은 현지인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디스크로 허리가 좋지 않은 장호의 표정은 일그러져갔다. 예정대로라면 3시간 걸린다고 하니, 조금만 참으시게.
머나먼 바라나시운전수는 버스가 부서질라 울퉁불퉁한 길을 능수능란한 솜씨로 달렸다. 한 두어 시간 달린 후에 버스는 작은 소도시에 잠시 정차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버스가 고장이 나 출발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승객이 타고 내리는 것을 관리하던 젊은 버스보조원이 엔진룸을 모두 열어붙이고 엔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우리가 예약한 바라나시 행 기차에 탑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상황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병오형은 이러다가 기차를 놓칠지나 않을까 걱정돼 사트나로 출발하고 있는 다른 버스로 갈아탈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병오형은 버스 승객들 틈에서 "이러다간 기차를 놓치겠다, 수리가 되긴 되는 것이냐, 어떤 방법이 없느냐?"며 안절부절하였다. 그런 병오형에게 인도인들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5분이면 된다, 걱정마라" "괜찮다, 고친다고 하지 않느냐" "버스 안에 가서 편하게 기다려도 된다" "나도 같은 상황이다" "내가 핸드폰으로 기차 시간을 봐 줄테니 기차 넘버를 불러봐라" 하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참 재미난 것은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버스가 고장 나 기약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데도 어떤 조바심도 내지 않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여유까지 부렸다. 그곳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근심과 불안에 쌓인 것은 우리뿐이었다. 이 사람들 진짜 뭐야? 호접몽(胡蝶夢)이다. 인간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인간이 된 꿈을 꾸는 것인지 이곳, 이 시간, 이 상황이 모두 헷갈렸다. 우리는 인간의 꿈을 꾸고, 인도인들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누구의 꿈이 진짜 꿈인가?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찬바람까지 스산하게 불기 시작하는 그때, '부르릉' 하며 힘차게 차의 시동이 걸렸다. 이제껏 엔진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인도 승객들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니, 어두컴컴한 차 안에 무표정한 인도인들의 하얀 눈이 정적 속에 깜박거리고 있다. 그 모습이 어떤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인 듯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당신들, 인도인 맞다.'
우리가 요란법석을 떨어서인지 버스는 자기 능력을 다해 내달렸다. 그나마 좁은 도로인데 양쪽으로 주차된 차량으로 길은 더욱 좁아져 있었다. 어둠과 끊임없이 눌러대는 경적소리, 갑자기 튀어나오는 오토바이에 우리 셋만 깜짝 놀라 순간순간 자지러졌다. 그러나 버스 안의 많은 눈들은 소리도 없이, 외부의 자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리고 고요히 깜박깜박하고 있었다. 진짜 이건 꿈이다. 호접몽이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주위 현지인에게 차가 정차한 곳이 사트나인지를 확인한 후, 짐칸에서 후다닥 짐을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옆에 있던 릭샤 왈라가 우리의 허락도 없이 자기 릭샤로 짐을 실어대기 시작했다.
"이봐, 우리 짐이야. 우린 기차역으로 간다고." 그는 연신 "OK!"만 외쳤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 함께 릭샤에 탄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기차역으로 가는 릭샤가 맞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기차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시 40분. 사트나에서 바라나시로 떠나는 기차의 출발 예정 시간은 7시 20분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최소 1시간은 연착하겠지라는 믿음이 있기에 사뭇 여유까지 부렸다.
그런데 사트나 역 전광판에 떠 있는 바라나시행 기차는 7시 30분 도착, 7시 40분 출발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런 제길. "달리자!" 우리 셋은 병오형을 선두로 기차가 정착해 있는 플랫폼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필 일이 꼬이려는 것인지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차는 입구 바로 앞에 있는 플랫폼에서 탑승했는데, 이 차의 탑승 플랫폼은 육교를 넘어가야 하는 PT2였다. 오늘따라 가방에는 돌이 들어있는지 천근만근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육교를 넘을 때까지 기차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S5칸을 찾아라. 오늘따라 왜 그렇게 객차는 많은 거야?
S5칸에 올라타자마자 장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장호야, 이것은 모두 호접몽이야." 저녁으로 한국에서 사 가지고 온 다이제스트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장호는 속이 너무 안 좋아 과자 한 조각도 넘기지 못했다. 덜커덩, 기차는 출발하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린 서로 마주보며 침묵의 위로를 나누었다. '휴, 다행이다.'라는 말을 건넬 힘조차 바닥났기 때문이다. 이후 인도 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젯밤 12시 아그라에서 기차를 탄 이후 무려 20시간 동안 우린 모든 것을 '오버(over)'했다. 아그라에서 카주라호까지의 밤기차에, 릭샤에, 로컬 버스에, 이 기차까지…
지친 몸을 침대 위에 털썩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의 움직임이 예민한 감각에 포착되었다. 순간 1층 침대 아래에서 살찐 생쥐 한 마리가 쏜살 같이 건너편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오종종 따라가는 울트라 인도 바퀴벌레! 허걱, 이건 호접몽이 분명해! 하지만 난 동요하지 않았다. 완전 방전이 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