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3포를 넘어선 n포의 시대. 여기 포기 대신 선택을 하는 아이, 열아홉살 지원이가 있습니다. 수능 대신 취업을 선택한, 제 딸 지원이의 다이내믹한 성장과 독특한 선택의 과정을 한해 한해 시간의 역순으로 소개합니다. - 기자말

 지하도에서 만난 노숙인에게 딸 지원이는 얼마를 줬을까.
지하도에서 만난 노숙인에게 딸 지원이는 얼마를 줬을까. ⓒ fabioaal

아이와 지하도를 내려가는 참이었다. 그날은 무척이나 추운 밤이었다. 평소 붐비던 거리에도 오가는 사람이 뚝 끊겼다. 영하 10℃를 넘어가는 추위 속에 조금이라도 따뜻한 지하로 피신하듯 뛰어 내려가는 계단에 구걸하는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노인도 불구도 아닌 남자는 구걸의 의지도 없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계단은 싸늘했고 그 사람은 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다행히 시간 여유가 있었고 계단의 경사가 굽어 있어 바로 앞에서 돈을 꺼내는 민망함을 피하기도 좋은 여건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난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딸 아이에게 주며 말했다.

"저 사람 너무 추워 보여. 가서 이 돈을 드리고 올래?"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천 원? 그냥 넣어두세요. 나도 돈 있어요."

그리고 아이는 우리가 지나온 모퉁이를 돌아 다시 계단을 올라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이는 돈을 바구니에 떨구고 돌아오리라 짐작되는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지체하고서야 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걷는 아이를 보며 난 궁금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마를 줬는지 물었다. 아이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5000원이오"라고 말했다. 5000원은 아이의 1주일 치 용돈이었고 그 순간 아이가 가진 돈 전부였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아이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아무런 요량도 없이 그냥 주고 온 것이다. 나는 또 물었다.

"왜 그렇게 시간이 걸렸어?"

아이는 대답한다.

"응, 그 아저씨 쳐다보고 웃어주고 오느라고요."

"아이가 뭘 잘해요?" 대부분의 대답은...

나의 딸 지원이의 중1, 14살 때의 일이다. 자연스러운 것들이 곧 잊히듯 아이는 그 일을 금세 잊어버리지만 나는 기억한다. 지원이가 가진 또 하나의 재능을 발견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어슐리 르귄의 작품 중 <바람의 열두 방향>이라는 단편집이 있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 여기저기 붙여보고는 했는데 그중 하나가 '재능의 열두 방향'이다. 아이가 가진 다양한 재능을 보며 떠올린 나름 근사한 문학적 표현이다. 아이들의 재능을 설명하기에 열두 방향으로는 한참 모자라지만 말이다. 나는 아이들(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가끔 묻는다.

"넌 뭘 잘하니?"
"넌 무엇을 하고 싶니?"
"아이가 뭘 잘해요?"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해요?"

단순한 궁금함과 일상적인 인사치레로 물어본 것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부모들도)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오는 답은, 주로 아이들의 경우 "없어요"이고 부모들의 경우 "모르겠다"이다. 이런 대화가 오갈 때마다 나는 놀란다.

'잘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가? 아니,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가?'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별 관심이 없는가?'

이런 생각 때문이다. 아이 교육에 목을 맨다고 하면서 정작 아이가 가진 재능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은 뒷전인 현실이 내게는 아이러니다.

왕따 초등학생과 지원이

 지원이 친구들의 이름으로 꾸민 캘리그라피.
지원이 친구들의 이름으로 꾸민 캘리그라피. ⓒ 최경숙

나의 딸, 지원이는 다양한 재능을 지녔다.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춘다. 언어적인 감각도 있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내가 아이에게서 발견한 것은 이러한 기능적 측면의 재능만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재능 외에도 무수한 재능이 있다. 그중 하나가 위 일화를 통해 발견한 재능, 바로 베푸는 마음이다.

아이는 추운 날, 동전 몇 닢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앞에 두고 앉아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고 제 마음이 가는 대로 가진 돈을 아낌없이 줄 줄 알았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아이가 6학년 때, 반에는 왕따를 당하는 남학생 하나가 있었다. 지원이는 그 남학생 이야기를 자주 했다. 아이들이 아무도 그 아이와는 같이 안 논다, 놀릴 때만 그 아이와 말을 한다, 소풍을 가서도 혼자 밥을 먹는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마침내 작은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 지원이는 아이들이 그 남학생한테 너무 했다며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선생님께 그 날의 내용을 이야기하고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베푸는 마음은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베푸는 마음이 아이의 중요한 재능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의외로 이 재능이 아이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지원이는 친구들에게도 맛있는 것을 사주고 선물을 챙겨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친구의 생일이라도 되면 지원이는 며칠 전부터 분주했다. 선물을 사고 예쁜 캐릭터를 넣어 손편지를 쓰고 포장지 그림도 직접 그리는 정성을 보였다.

한번은 나의 직장에서 농가 일손돕기 지원을 나간 적이 있다. 휴일이었기에 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중학교 1학년 아이는 그날 대단한 일꾼이었다. 흙에 뿌리를 내린 양파를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뽑아 망에 담는 작업은 고된 일이었다.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양파를 뽑는 아이를 보고 동료들이 지원 나간 농가의 손녀인 줄 알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재능이 있습니다

 일본 여행때 일본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
일본 여행때 일본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 ⓒ 최경숙

내가 관찰한 지원이의 또 다른 재능은 사람을 끄는 것이다. 아이가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함께 외출한 아이는 한사코 엄마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의 발로 걷고 싶어 했다. 나는 아이를 땅에 내려줬다.

아이가 처음으로 집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제 발로 걷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위태위태한 걸음을 디디면서도 땅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았다. 자신이 걷고 있다는 이 중차대한 일에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이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은 대개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줄기찬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고 하다못해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가곤 했다. 어릴 때부터 지원이는 사람의 주목과 관심 받는 것을 즐겼고 이런 성향의 결과로 자연스레 사람을 끌었다. 어느 캠프에 가든지 지원이가 속한 조는 우승을 자주 했고 상품을 휩쓸었다. 교회에서 청소년부 찬양을 인도하던 지원이가 이사를 이유로 빠지자 출석하던 아이들이 줄었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재능 덕에 지원이는 세 번의 전학으로 시골과 중소도시와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친구를 사귀고 새 환경에 적응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새 학교에 와서도 이전 학교에서 사귀던 친구들을 알뜰히도 챙기며 인간관계를 확장해갔다.

이러한 사람 끄는 재능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발휘돼 중2 때는 블로거 활동으로 4만 명이 넘는 방문자를 모으기도 했다. 이외에도 숱한 재능이 있다. 사람들을 웃기는 재능, 주변을 활기차게 만드는 재능, 조리 있게 말할 줄 아는 재능 등등 끝이 없다.

재능의 '한 방향'만 요구하고 있진 않나요?

물론 아이가 내게 특별하고 놀라운 존재임은 틀림없지만 남달리 우월한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재능이 없다고, 모른다고 말하면 의아하다.

왜일까? 내가 보기에 아이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재능의 열두 방향'이 아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아이들에게는 '재능의 한 방향'만이 요구되고 있다. 바로 공부 잘하는 재능이다. 그 외의 다른 재능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호들갑을 떨거나 심드렁하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가진 눈부신 재능에 비하면 공부를 잘 하고 못하고는 정말 작은 부분일 뿐이라고.

오늘도 지원이는 19살 나이에 진학 대신 선택한 일터인 광고디자인 회사로 씩씩하게 출근한다.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도, 젊고 활기 넘치는 동료들도 좋단다. 과제나 공모전을 위한 것이 아닌, 진짜 일을 하는 것도 신이 난다.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어디를 가든 주변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아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 그렇게 지원이가 지닌 '재능의 열두 방향'은 지원이의 삶에 기여한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아이의 재능#베품#구걸#바람의 열두 방향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