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미소는 희게 응고된 채 굴러다니겠지. 툭 차면 녹아서 사라지겠지. 그 얼룩 위에 누워서 나는 중얼거릴 거야.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말을 - '말' 中"단 하나의 말"이 있다. 그 말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듯이 화자는 생각한다. 심지어 미소가 녹아 얼룩진 자리에 누워 그 말을 중얼거릴 것이라고 얘기한다. 마치 자신만이 아는 비밀인 것 마냥, 그래서 "단 하나의 말"이 무척 특별하다는 듯이 대하고 있다.
검은 주머니 속에 숨겨둔 고백을 만져본다 -'채식주의자' 中주머니 속에 숨겨둔 고백?
"단 하나의 말"은 "검은 주머니 속에 숨겨둔 고백"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우리는 '숨겨둔'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백'은 주머니에 숨겨둘 만큼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어떤 비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비밀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고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일까? 그것은 언젠가 화자가 자신이 숨겨둔 이 비밀을 사람들에게 밝히겠다는 의지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 즉 화자는 궁극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말"을 언젠가 발설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그토록 하고픈 말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둥그런 식탁 위에서검게 굳어가는 얼룩처럼오래된 습관처럼목구멍으로 사라지기 직전혀끝으로 만져보는 흰 글자들한 줌의 소금과 바꿀 수 있을까백지 위에서 사라지는 말그것은 패배자의 투명한 외투너는 어제 죽었다무거운 소금 자루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말' 中"목구멍으로 사라지기 직전 혀끝으로 만져지는 흰 글자들", 그러니까 '흰 말들'이 있다. 그것은 혀 끝에 닿으면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소금과 같다. 또한 '어제 죽은 너' 역시 소금과 같다. 바꿔 말하자면, 소금은 어제 죽은 너와 같고, 그것은 다시 '흰 말들'은 '어제 죽은 너'와 같다는 공식이 성립된다. 정리하자면, '흰 말'과 소금은 '어제 죽은 너'이다. 이 셋의 공통점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집어삼킬 것이고너를 통과할 것이고세계의 텅 빔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어느 날 나는 콘크리트 다리 아래서 죽은 너를 발견할 거야. - '말' 中화자는 죽은 너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발견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너'가 죽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너'라는 인물은 죽는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일까? 이기성의 시에는 '너'라는 지칭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너'는 나한테 먹히는, 혹은 식탁 위에 놓인 어떤 음식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시집에서 나온 '너'라는 인물은 "커다란 접시 위에 당신의 잘린 목"(채식주의자)과 같이 대체로 이미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너'라는 대상이 어떤 한 인물이 아니라 어떤 관념 즉, 죽음 그 자체라고. 시인이 먹고자 하는 것은 언젠가 있을 자신의 죽음이며, 그리하여 죽음을 넘어서 "세계의 텅 빔 속"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채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이기성의 시들은 그로테스크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일관한다. 이런 분위기는 "시간의 흐름과 상실에서 기원"한 것이며, "'부재', 곧 '텅 빔'의 실질적 주체이자 도달점이 '죽음'임을 따로 밝힐 필요가 있을까"라는 최현식 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이기성 시인은 본인의 시에서 죽음의 시학을 펼친 것이 자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죽음의 속성인 '상실'과 '부재'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이면서 냉철하게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 이기성 시인의 뚜렷한 색깔이다. 어쩜 시인은 일부러 본인의 감정을 억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야 죽음의 그 차가운 느낌을 더욱 극명히 드러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말인지 알아낼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그것은 아마도 어떤 말이라기보다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소리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