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학년을 4년째 맡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다. 처음에는 마냥 예쁜 것 같았는데... 참 손이 많이 간다. 학생들을 학교라는 냉정한 세계에 적응시키기 위해 갖은 묘수를 내어 본다. 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 반에는 어린이집에 다닐 적 언어치료를 받은 철이(가명)가 있다. 또래들보다 어리고 주변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듯 수업 도중에 가끔 떼를 쓰거나 돌아다니는 친구다. 글자는 제법 알지만 공부를 시작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개별 지도를 하거나 제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쉽게 학습에 참여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친구들은 대개 옆에 있는 짝이 수고를 많이 해주게 된다. 내가 항상 철이 짝지에게 공책을 좀 보여달라, 교과서를 찾아봐 주라, 연필을 빌려달라 등의 부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감사의 말도 대신 전한다, 고마우니까.
"철이에게 공책 빌려줘서 고마워!""철이에게 알려줘서 고마워!" 사실 좀 귀찮을 법도 하지만 이런 경우, 개인의 특성이나 성향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겪은 학생들 중에는 철이보다 '아주 조금' 학습적으로 앞선 친구들이 더 적극적이다. 자신의 작은 선의와 지식이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그들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학습적으로 많이 앞선 친구들은 철이 같은 친구를 처음에는 잘 도와주지만, 답답하다고 느끼는지 열의가 차츰 식어감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는 철이는 방과 후 시간에는 우리 교실 바로 앞 돌봄 교실에 간다.
얼마 전이었다. 애들이 모두 돌아가고 교실 청소를 마치고 잠시 여유가 생겨 숙제를 하라고 철이를 불렀다. 교실로 들어오는 철이는 돌봄 교실 장난감 블록 중에 한 개를 손에 들고 왔다. 흰 곰 모양의 블록!!
"철이가 좋아하는 거야?""응."분위기가 편한지 반말로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곰돌이가 희고 참 귀엽네! 이제 철이 숙제해야지"라며 자리에 앉도록 했다. 철이가 가져온 곰돌이는 옆 책상에 올려 두었다. 철이는 좀처럼 시작을 못한 채 공책을 찾고, 가방을 뒤적이며 연필을 찾고, 책상 속을 들여다보고 그런다.
"곰돌아, 철이가 이제 숙제하려나 봐."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곰돌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순간 철이의 눈빛이 달라 보인다. 어느새 철이는 공책에 숫자를 1, 2, 3, 4...10까지 적었다. 나는 얼른 귀여운(?) 아기 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기 곰 목소리로)"네, 선생님. 철이 이제 숙제할 거 같아요."분위기를 만들어 줘서 일까? 철이는 어린 동생(곰돌이)에게 보란듯이, 후딱 공책 한 바닥에 낱말 쓰기를 했다. 새삼 신기하고, 재미있고, 놀라웠다.
"선생님, 숙제 다했어요." 철이가 말한다.
"벌써?" 사실 곰돌이 흉내를 낸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해본 것인데,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철이가 너무 귀엽다, 곰돌이보다 더! 그래서 나는 다시 곰이 되었다.
(아기 곰 목소리로)" "선생님!!! 철이가 숙제 다 했어요. 진짜 잘했죠!"철이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번진다.
또래보다 어리고, 주어진 과제에 대한 집중력이 조금 모자라기는 해도 상상력은 누구 못지않게 풍부한 철이였던 것이다.
철이는 숙제를 마치고 의젓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곰돌이를 들고 다가가자 순간 곰돌이에게 뽀뽀를 해주는 게 아닌가. 마음으로 자기를 응원해 준 곰돌이가 블록이 아닌 친구가 되는 순간이었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장면이었다.
철이는 내 손의 곰돌이를 돌려받고 돌봄 교실로 갔다. 그 다음 날, 나는 곰돌이를 아예 우리 교실로 모셔왔다.
곰돌이와 나는 연합군이 되어 철이를 응원하고 있다. 나는 블록 응원군을 거느린 철이의 선생님이라서 행복하다. 철이와 동심의 세계를 거닐 수 있어서.
덧붙이는 글 | 교실에서 일어나는 아이들과의 일상을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