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투하로 기억되는 히로시마, 피해자 일본 강조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히로시마에 간다고 한다. 히로시마는 원자폭탄 투하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이다. 지금은 원폭돔에, 평화공원에, 평화기념 자료관까지 들어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염원하며 머리를 숙이는 곳이다.
히로시마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넉넉한 강줄기들이 있고, 사람들은 차분하다. 평화롭다.
그런데 피폭의 눈물로 만들어낸 '평화도시' 히로시마는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다. 미국의 원폭이 정당화될 수야 없겠지만, 2차 대전 내내 군사도시였던 히로시마는 반성이 없었다.
지금도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피폭으로 멈춰버린 시계, 잔해만 남은 세발 자전거로 피해자 일본만 전시하지, 수십 년 이웃나라들을 점령하고 착취했던 가해자 일본은 없다.
세계인을 불러모으는 평화공원답게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참배객이 드나든다. 특히 눈에 띄는 장면은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내리는 발랄한 중고등 학생들. 깃발 든 나이 지긋한 해설사가 학생들에게 1945년 피폭당한 나무도 소개하고 원폭사망자 추도 기념관도 안내한다.
달팽이관처럼 생긴 추도 기념관은 지하 1층에서 천천히 원을 따라 돌면 지하 2층에 도달한다. 그렇게 내려가는 동안 벽면에는 히로시마 피폭 관련 사실들이 적혀 있다. 그 안내문 중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가 있었다는 간단한 글도 있다.
2013년 잠시 히로시마에 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해설사와 학생들 팀을 따라 그 길을 내려갔지만, 외국인 희생자가 있었다는 안내를 하는 해설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 한국인 위령비, 당시 피폭자의 10%가 한국인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는 한국인 위령비도 있다. 1945년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는 8만에서 10만 여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한다. 피폭자만 해도 5만이 넘고, 사망자가 3만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히로시마 피폭자의 약 10%가 조선인이었다고 추정한다.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되었건, 자발적으로 갔건 히로시마에 갔던 조선인들은 낯선 땅에서 원자폭탄에 쓰러졌다.
상처입은 조선인 피폭자들이 해방을 맞아 일본을 떠나자 일본은 이 피폭자들을 잔인하게 외면했고, 우리 정부도 나몰라라 했다. 한국인 위령비는 평화를 말하던 일본인들이 세운 비가 아니다.
아무도 기려주는 이 없는 이들을 위해 조선인들이 스스로 세운 비이다. 그마저도 초기에는 평화공원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 서 있어야 했다.
이번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문 때 이 한국인 위령비를 방문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전쟁 침략자 일본이 피해자로 옷을 갈아입고 큰 소리치지 않도록 하고, 정말 전쟁과 원자폭탄으로 인한 희생을 말하려면 가장 약자였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전쟁을 반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히로시마는 군사도시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제5사단이 주둔했던 히로시마에는 특히 2차 대전 당시 우지나항을 통해 침략에 나서는 무수한 일본군인들, 그리고 군인들을 위한 통조림 공장, 군복을 만드는 피복지창, 병기를 만드는 병기지창, 그리고 미쯔비시중공업에서 운영하는 조선소와 기계제작소 같은 군수공장들이 즐비했다.
지금도 히로시마에는 군사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수십 채 붉은 벽돌 건물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던 병기지창은 폐허로 몇 건물이 남아있고, 제5사단이 머물렀던 히로시마성에도 주둔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 밝은 사람들만이 그 곳을 찾아낼 뿐이다.
일본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침략의 역사는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빽빽했던 군사시설을 허물어버린다고 해도, 고통받았던 재일조선인들이 그 곳에 있고, 한반도에 있고, 아시아 곳곳에 있다.
히로시마가 평화공원으로 학생들을 불러모아 피폭자 일본을 말한다고 평화도시가 되지 않는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그 자리에 세운다고 평화도시가 되지 않는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해야만, 그래서 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웃을 수 있을 때라야 일본에는, 히로시마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그 때 평화도시가 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그림은 2013년 히로시마에 잠시 머물 때 그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