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페이스북 '강남역 10번출구' 페이지 관리자 중 한 명인 양지원이라고 합니다. 매일 정신 없이 추모제를 진행하다 보니 저희 페이지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희 페이지에 보내주시는 관심에 감사드리며 저희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나갈 계획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인은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라고 살해동기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그가 당했다는 '무시'가 구체적 사실로 드러난 바는 없습니다. 그의 실체 없는 분노는 무고한 여성에게 향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수많은 여성들의 범죄 피해사실들을 접해왔고, 그것들 대부분을 일상적인 사건의 하나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 가해자의 진술과 CCTV 증거들은 이 사건이 명백하게 특정 여성을 타깃으로 삼고 벌어진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여성이라는이유로 노출되었던 수많은 폭력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여금 우리 사회가 단지 여성이라는이유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사회임이 명명백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경찰은 범행 동기에 '묻지마 살인'으로 단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함께 여성주의 공부를 했던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저희는 이 문제가 단지 하나의 '묻지마 살인 사건'이 아닌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여성혐오'에 기반한 살인 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 전국적인 추모 열기가 해프닝으로 끝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가 가장 극단적인 현상으로 드러난 것임을, 그리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변화해야 함을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느낀 것은 다만 저희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의 추모와 여성혐오사회에 대한 분노가 포스트잇에 담겼습니다. 저희는 '강남역 10번출구'라는 페이지를 제작한 후, 마이크를 들고 추모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강남역 10번출구로 나가 시민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7시 반, 강남역 10번출구에서 그 어디에서도 말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한국은 여성 혐오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회가 '여성 혐오사회'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저희를 포함해서 여성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성추행, 성희롱, 성폭행 등을 경험하며 자랍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체 강력 범죄 사건 피해자의 84% 이상이 여성입니다(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또한 OECD 가입국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입니다. 또한, 인터넷에는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하고 희화하는 악성 댓글들이 난무하고,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맘충', '삼일한', '성괴' 같은여성혐오적 언어가 넘쳐나고 있지만 이것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런 한국 사회에서 살아 온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여성혐오적인 사고방식에 깊게 물들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말들.
범행 동기와 정황에서 보았듯이 이 사건은여성혐오에 의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3일 강신명 경찰청장은 '강남역 20대 여성 살인사건'과 관련해 이는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질환에 따른 '묻지마 범죄'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심지어 '정신질환자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는 등 범죄 예방을 위해 치안활동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이와 함께 타인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람을 행정 절차를 거쳐 강제 입원 시킬 수 있는 '행정입원' 조치를 취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여성이라는 약자 대상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또 다른 약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겠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경찰을 위시한 공권력조차 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22일 자정을 기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있던 모든 포스트잇은 시민들에 의해 수거되어 서초구청을 거쳐 시청으로 보내졌습니다. 비 예보도 있었고, 일부혐오세력에 의해 추모의 메시지들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거의 일주일 동안 수천 명의 발걸음이오갔던 상징적인 추모의 공간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희도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추모제를 그만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나 자유발언대에서 모인 많은 시민들이 저희에게 계속해서 질문하셨습니다. "내일도 추모제를 진행하나요?"라고요. 각 대학을 포함하여 전주, 대구, 부산, 제주까지 한국의 곳곳에서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이 작은 자유발언대가 그간 말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여는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은 곧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늘 벌어지는 사건들 중 하나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여성 혐오에 기인한 사건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사건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그 사건 또한 수많은 '평범한' 사건들 중 하나로 남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여성들의 피해 사례 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사건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 혐오의 맥락상에 있음을 공론화 시키고, 대대적인인식 변화와 제도적 장치 마련을 이뤄내고자 연대하고 행동하려고 합니다.
저희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를 해결하기 위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들을 계속해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인증샷' 캠페인입니다. 어떠한 종이에라도 좋습니다. "여성혐오에 맞서야 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우리는연결될수록강하다 라는 해시태그를 써서 카메라로찍어 페이스북으로 올려주세요. 많은 분들이 여성혐오에 맞서겠다는 메시지를 던짐으로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뿌리뽑기 위한 한걸음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5일부터 '강남역 10번 출구'의 자유발언대 장소가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7일 새벽 강남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 같은 여성혐오적 맥락의 폭력은 사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데에 장소의 제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언제나와 같이 오후 7시 반입니다. 좀더 많은 분들의 또 다른 목소리와 생생한 증언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성혐오에 의해 희생된 모든 여성들을 추모합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성혐오에_맞서야_합니다#우리는_연결될수록_강하다#STOP_MISOGYNY 덧붙이는 글 | * 종이에 '여성혐오에 맞서야 합니다.'라는 문구와 위의 해시태그 중 마음에드는 것을 적고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려주세요.
* 캠페인에 함께할 친구 두 명을 태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