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자치기구 회장을 맡았었다.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총여학생회, 대의원회, 동아리연합회, 각 단과대 회장까지만 들어가는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의 멤버였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자치기구 회장을 맡았었다.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총여학생회, 대의원회, 동아리연합회, 각 단과대 회장까지만 들어가는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의 멤버였다. ⓒ pixabay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자치기구 회장을 맡았었다.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총여학생회, 대의원회, 동아리연합회, 각 단과대 회장까지만 들어가는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의 멤버였다. 각과 학생회장까지 포함하는 운영위원회(운영위)는 꽤 큰 규모였기에 중요한 결정사항들은 중운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리고 나라 전체가 그렇듯이 대학의 정치 현장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남성 중심적이다. 남학생들은 3, 4학년이 되면 여학생보다 학번이 높고,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여학생이 많은 학과나 학부, 단과대라 하더라도 학생회장은 남자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남자 회장-여자 부회장'의 구도는 정말 질릴 정도로 많다.

중운위 멤버는 나를 포함해 여학생은 서너 명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 남학생들었는데 학교에서도 입김이 세기로 유명한 공대에서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대의원회, 동아리 연합회 회장과 부회장을 거의 다 맡아가다시피 했다. 그 시절 여대를 빼고 다른 학교들도 다들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안다.

신입생 OT라는 큰 행사를 마치고 난 시점이었다. 총학생회의 잘못된 운영으로 많은 학생이 불만을 제기했고, 특히 회장단의 저항이 거셌다. 나를 비롯한 중운위 위원들은 이에 대해 총학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겨울방학과 새 학기 초는 자치단체장과 총학의 힘겨루기가 심한 시기다. 이때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한 쪽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 정치지만 실제 정치판과 다를 게 별로 없다.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각과 회장들의 불만사항들을 접수하고, 정리했다.

나는 여학생이었지만 학번 높은 남자 회장들 사이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 나름 '깡'이 있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역할이 주어졌다. 몇몇 회장들이 먼저 의견을 제시하면 '논리적이고 침착한 태도로 조목조목 잘못을 따져 최종 정리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렇게 회장단과 역할을 나누고 의기투합한 후 흩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운영위 회의를 하는데 회의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도 그 안건을 꺼내지 않는 것이다. 총학이 준비한 안건들을 다 처리하고 다른 안건 있으십니까? 건의사항 있으십니까? 하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 숙이고 뭘 메모하는 척하면서 입 다물고 있던 것이다. 눈치를 살피던 나는 총학생회장이 '그럼 이것으로서 운영위를 마치겠...'하는 순간에 손을 번쩍 들고 '저 의견 있습니다' 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중운위 멤버들의 표정들이란.

서너 명 정도가 돌아가며 하기로 했던 이야기를 결국 나 혼자 다 해버렸다. 문제점을 일일이 다 언급하고 정리한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운영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총학생회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합니다!'라고. 총학생회장은 얼굴이 빨개졌고, 각과 회장들은 웅성웅성하고, 중운위 회장들은 계속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총학생회장은 어쩔 수 없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얼굴로 변명 섞인 사과를 했다.

나중에서야 그 회의가 있기 며칠 전에 나와 다른 한두 명의 여학생을 빼고 남자 회장들끼리 룸살롱인지 나이트 룸인지를 가서 양주 마시고 놀면서 자기들끼리 화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총학이 술을 사고, 다른 중운위 위원들은 그걸 얻어먹었으며 남자들끼리 '룸 정치'를 한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해결할 문제를 매우 사적인 공간에서 남자들끼리, 그것도 학교 정치에서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남자들끼리 해결했다. 그들은 군필자 복학생들이었고, 공대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공대생이 아니어도 룸살롱과 양주면 얼마든지 뭉칠 수 있는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명예남성' 혹은 '독한 년', 그렇게 살아남는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뛰어난 스펙과 능력을 갖췄어도, 스스로 '명예남성'이 되어 "남자들이 룸살롱에서 회의할 수도 있죠, 저도 갈 수 있어요"하면서 얼굴에 철판 깔고 그 자리에 끼어들어 폭탄주를 수십 잔씩 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어야 겨우 '독한 년' 소리 들으면서 버틸 수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뛰어난 스펙과 능력을 갖췄어도, 스스로 '명예남성'이 되어 "남자들이 룸살롱에서 회의할 수도 있죠, 저도 갈 수 있어요"하면서 얼굴에 철판 깔고 그 자리에 끼어들어 폭탄주를 수십 잔씩 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어야 겨우 '독한 년' 소리 들으면서 버틸 수 있다. ⓒ pixabay

나는 정치적인 능력이나 리더십과 상관없이 여자이기 때문에 배제됐다. 나는 선출직 자치단체장이 되기까지 학생회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명예남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학과에서 남자 후배들에게 '형'으로 통했다. 술을 남학생들보다 잘 마셨으며, 술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었다.

여자 동기들보다 복학생 선배들과 어울려 다녔고, 남자 후배들과 친하게 지냈다. 학교 축제가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서 잠을 잤고, '야동'을 다운 받아 보는 남학생들과 아무렇지 않게 '섹드립'도 하는 쿨한 여자였다. 그들은 평소에 나를 형제처럼 대했지만 남자들끼리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배제했다. 왜냐하면 나는 생물학적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굴러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남성들의 사회는 군대만이 아니다. 군필자 복학생들로 이루어진 대학 정치판이 그렇고, 그 대학생들이 회사에 들어가면 여자 간부를 빼고 남자들끼리만 회식하면서 중요한 사항을 결정한다.

여자 검사들을 빼고 남자 검사들끼리 성접대를 버무린 술자리를 가지면서 일감을 나누고, 남자 기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남자 직원들끼리 접대하고, 접대받는다. 회식 자리에서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는 한국 기업의 문화는 유명하다. 거기에 여자는 없다. 여성은 끊임없이 배제된다. 그래놓고 '여자는 사회생활을 못한다'고 한다.

각 가정으로 가면 남편들은 회사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대하느라 어쩔 수 없이 룸살롱을 가고 성매매를 했다고 변명한다.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있고, '현명한' 아내라면 그런 문제쯤 쿨하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은 수없이 많은 공간에서 수없이 많이 배제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너무나 손쉽게 지워진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뛰어난 스펙과 능력을 갖췄어도, 스스로 '명예남성'이 되어 '남자들이 룸살롱에서 회의할 수도 있죠, 저도 갈 수 있어요'하면서 얼굴에 철판 깔고 그 자리에 끼어들어 폭탄주를 수십 잔씩 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어야 겨우 '독한 년' 소리 들으면서 버틸 수 있다. 실제로 룸살롱 회의에 따라가는 여성들이 있다.

남자들이 2차(성매매) 가기 전까지 버티면서 완전히 남자처럼 굴어야, 그 정도는 해야 임원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것이다. 남근 중심 사회에서 여자는 가짜 남근을 달고 자신의 여성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함으로써만 인정받는다.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인정 말이다. '여자가 대단하네', '여자가 얼마나 독하면 임원까지 됐을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리얼리티'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 무지'

 영화 <내부자들>에는 여자가 없다. 재벌과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이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사회의 추악한 민낯, 배신당한 건달과 정의로운 검사가 활약하는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그 스펙터클한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아주 작은 역할의 여성들이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헐벗고 나오는 성접대 여성들이다.
영화 <내부자들>에는 여자가 없다. 재벌과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이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사회의 추악한 민낯, 배신당한 건달과 정의로운 검사가 활약하는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그 스펙터클한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아주 작은 역할의 여성들이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헐벗고 나오는 성접대 여성들이다. ⓒ 쇼박스

영화 <내부자들>에는 여자가 없다. 재벌과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이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사회의 추악한 민낯, 배신당한 건달과 정의로운 검사가 활약하는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그 스펙터클한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아주 작은 역할의 여성들이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헐벗고 나오는 성접대 여성들이다. 남자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자기들끼리만 은밀하게 정치적 이야기를 나눈 후에, 모종의 거래가 성사되고 나면 여자들을 '들이라'고 말한다.)

할리우드에서 남자 배우를 위한 시나리오만 가득하다고 여성 배우들이 불만을 제기했다고 하는데, 충무로도 마찬가지다. 나는 리얼리즘 내러티브가 유행하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영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일부러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는 내부자들이 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성을 주연으로 내세운 시나리오를 쓰려고 해도, 로맨스물이 아닌 이상 불가능할 것을 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일어나고 있는 여성 운동은 사회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단순한 살인사건에 대해 단순히 '죽이지 마세요'하는 게 아니다. 사회 전체가 여성을 죽이고 있다.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 삼고, '여성성을 죽여야만 살 수 있게' 만든다.

한 여성이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 그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추모하고, 여성의 불안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 남자로 위장하거나 남자의 보호를 받거나 남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회적인 의미의 '여성살해'(Femicide)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공포를 이해해 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우리의 공포를 이해할 생각이 없다. 경찰청장이 나서서 이것은 '여성혐오 살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왜 여성혐오 살인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른 경찰은 '여성혐오'라는 단어 뜻을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도 여성혐오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아예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남자들로 넘친다.

그들은 지금 기꺼이 바보가 되어 맥락을 파악 못하기를, 말귀를 못 알아듣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우리가 당하는 공포와 억압을 이해하는 순간에 자신의 가해자성을 인정해야 하고, 동시에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이 문제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서 있는 그 자리'다. 그들은 한 여성의 죽음에서 '진실'을 포착하는 순간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여성의 실제적 죽음을 외면함으로써, 수많은 여성의 사회적 죽음 위에서 만들어지는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여성을 끝없이 외부자로 만듦으로써 남성들만의 내부자적 공모를 계속해 나가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다.

그들의 무지는 그래서 '적극적 무지'이다. 그들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된다.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 김예지

덧붙이는 글 | 여성주의 정보생산자 조합 <페미디아>에 올렸던 글을 중복 게재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남성중심주의#페미니즘#여성혐오
댓글1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