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 한눈에
- 그가 건져 올린 용어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거푸집, 까치발, 서까래, 붙박이, 담벼락, 줄눈, 호박돌, 지게문, 너새, 들보, 졸대, 뼈대, 멧쌓기, 사춤쌓기, 반자, 장지, 쇠시
공그리, 와리, 와꾸... 공사현장 아르바이트 경험담"그 현장 공그리 언제 친대?""화장실 전개도 그릴 때 타일 와리 잘 나눠서 해라.""이런, 모형 와꾸가 안 맞잖아!"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을 때였다. '이제 프로의 세계에 들어왔다!'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직장 상사가 툭툭 내뱉는 말은 공그리, 와리, 와꾸... 어리둥절해하던 내게 옆에서 슬쩍 건네주는 말, "현장 갔다 온 티내는 거야." 그제야 픽, 웃음이 나왔다.
낯선 환경이 실감날 때는 낯익은 학교 설계실이 영화 장면처럼 떠올랐다. 설계실 제도판에서 우리들은 배치도, 입면도, 단면도, 이런 단어들을 놔두고 굳이 사이트플랜, 엘리베이션, 섹션이 어쩌고저쩌고 했다.
간혹 프랑스어도 끼어들었는데, 뭣도 모르면서 에스키스니 무슨 무슨 데스빠스니 흉내를 냈다. 허영심도 있었고 답답한 현실에 대한 도피 심리도 있었다.
설계실에서 서태지 음악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며칠씩 밤샘 작업을 할 때는 반전이 일어났다. 마감 시간에 쫓기고 체력이 떨어질 때는 외국어도 무겁고 귀찮았다. 새삼스레 우리말이 집밥처럼 절로 입에 착착 감겼다.
그때쯤 복학생 선배가 입담을 과시하며 축 처진 분위기를 띄웠다. 물론 군대에서 했던 족구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대 후 복학하기까지 몇 달간 해 본 공사현장 아르바이트 경험담이었다.
공사장에서 일어나는 별별 에피소드에 현장 인부들의 걸쭉한 은어가 전문용어로 둔갑했다. 거기에 약간의 허세와 과장까지 얹으면, 우리들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게 되었다. 그러다 눈치 없는 동기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난 졸업하면 건설회사에서 딱 10년만 일할 거야. 그렇게 번 돈으로 카페를 차릴 거야. 카페 이름도 정해놨어. '엑소노메트릭(axonometric, 대상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방법 중 하나)'이라고." 느닷없이 카페라니…가 아니었다. 설계실 분위기가 이미 현실로 돌아선 마당에, 먼 나라의 언어 '엑소노메트릭'이 거슬렸다.
"뭐? 엑.소.노.메.트.릭? 혓바닥에 깁스할 일이 있나. 아나, 차라리 '거푸집'이라고 해라."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이렇게 받아쳤다. 다들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다. 하지만 광복 직후 어느 건축가에게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어로만 쓰는 건축용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1945년 광복이 되자 건축가 장기인은 감격으로 펄펄 날아오를 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혼란스러웠다. 분명 나라를 찾았는데 우리 것은 어디에 있나 싶었다. 일상에서 수시로 일본어가 튀어 나왔다. 직장에서 사용하는 건축용어는 죄다 일본어였다. 일본현장인가? 그 변화 없음에 문득 광복이 오긴 온 걸까 헷갈렸다.
그러고 보니 1916년에 태어난 그는 그때까지 일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건축 교육을 받은 곳은 경성고등공업학교였다. 가르치는 사람도 일본인, 배우는 사람도 대부분 일본인, 배우는 내용도 일본에 이식된 서양근대건축, 모두 일제의 관립학교다웠다. 졸업 후 학교 소개로 처음 취직한 곳도 경성부청이었다.
이제 광복. 주권을 찾았는데 일본어로만 쓰는 건축용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동료의 지적에 그는 결심을 했다. 우리말로 된 건축용어를 만들자고. 그는 일단 일본건축학회에서 펴낸 건축용어집을 번안하려고 했다. <조선어사전>, <한글갈말>, <우리말 큰사전> 등을 샅샅이 훑으며 건축 관련 용어들을 추려냈다.
그런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은 금지되었고, 장기인은 그런 일제의 제도권에서 성장하였다. 한글 사전에서 건축용어를 수집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있어야 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한자 사용도 차이가 있었다. 중국에 없는 한국 한자와 일본 한자가 있고, 같은 한자라도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한문으로 표기하는 것을 유식하고 점잖다고 여겨 한글 표기를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어의 한문을 그대로 한글음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건축 용어도 문제였다. 그것은 어딘가에 흩어져 있는 우리말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었다. '건축'이라는 단어부터 그랬다. 원래 한국과 중국은 '건축'이란 말대신 영건(營建)과 조영(造營)을 사용했다.
'건축'은 일본이 1880년대에 서양건축을 도입하면서 architecture를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의 조가학회(造家學會)가 1897년 건축학회로 개칭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 후 관직 개편과 함께 탁지부에 건축소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건축 용어였다. 그게 없으면 우리말 건축용어가 제대로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데 장기인은 경성고공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 고건축은 배웠지만 조선의 전통건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더구나 경성고공 출신 건축가들은 전통건축을 퇴보의 상징쯤으로 보았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그는 아무래도 우리말 건축용어를 맡을 적격자가 아닌 듯하다.
서른 살 장기인, 초등 중등 국어교과서 보며 다시 한글 익혀그런데 그에게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그의 의지였다. 서른 살의 장기인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교과서를 보면서 다시 한글을 익혔다. 원래는 쉽게 쓸 만한 건축용어를 찾으려고 들춰본 책이었다. 그러다 한글 공부가 되었다.
한글 맞춤법을 꼼꼼히 살피고, 동의어, 유사어, 동음어 등도 정리했다. 표준어뿐만 아니라 방언과 준말도 조사했다.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발음과 어감까지 체크했다. 걸핏하면 전기가 나갔던 상황에서 그는 촛불을 켜고 온갖 사전과 씨름을 했다. 한글, 일어, 영어, 한자 사전을 펼쳐놓고 금을 캐듯 단어들을 캐냈다.
둘째는 경성고공 졸업생치고 좀 특이한 실무 경력이 한 몫을 했다.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청, 철도국에 취직했던 선배들처럼 그도 처음에는 경성부청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채 1년이 안되었을 때 경성부청 영선과에 떠밀려 조선공영주식회사로 옮겼다.
조선공영주식회사에서 그가 6년간 맡은 일은 가회동 일대의 도시형 한옥이었다. 그때 한옥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들이 광복 후에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전통 목수, 와공, 미장공과 연결되어 전통건축 용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직장 동료를 통해 빌린 화성성역의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삽도의 정교함과 해설의 정밀함에 압도되었다. 그만큼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여느 근대건축가와 달랐다.
그렇게 모은 내용을 정리해서 건축학회에 제출하면, 학회 회원들은 매일 퇴근 후에 모여 심의를 했다. 십 수 차례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 내용은 전 회원에게 배포되어 다시 검토를 받았다. 그 과정을 통해 모인 오천 여 단어 중에서 삼천 단어를 골라 해설과 그림을 덧붙여 편집을 끝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원고 사수 작전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원고와 자료를 땅 속에 묻어 두었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보내 경성고공 동기인 신무성이 맡아 보관했다. 서울 수복이 되어서야 제자리에 돌아왔다.
다시 수정을 거쳐 대한건축학회에서 건축용어집을 처음 발간한 해는 1958년이었다. 우리말 용어집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과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있었다.
그 후로도 장기인은 우리말 건축용어 찾기를 평생 이어갔다. 그가 최고로 치는 용어는 순우리말이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누구나 이해하고 기억하고 표현하기 쉬운 생활언어, 시대의 변천에 상응하는 용어였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통용되는 한문과 외래어 표현도 함부로 버릴 수 없다고 했다. 1985년에는 그동안의 성과물을 모아 <한국건축사전>으로 펴냈고, 그 후에도 계속 증보판을 냈다.
그는 용어가 지식이라고 믿었다. 건축용어는 설계, 시공, 구조, 설비, 재료, 법규, 전통건축 등을 망라한다. 그만큼 여러 분야의 건축 지식을 섭렵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건축용어집을 출간한 이후 건축구조학, 건축시공학, 건축적산학 등의 대학교재를 편찬했다.
그때가 1960년대, 여러 대학에 건축학과가 신설되고 있었지만 변변한 교재가 없었을 때였다. 그의 책들은 어느 대학이든 건축과 학생이라면 한번쯤 봤을 정도로 교과서가 되었고, 아직도 판매중이다.
회갑 나이에 도전한 '한국건축대계', 문화재수리기술자들의 필독서그는 전통건축 전문가이기도 했다. 특히 전통건축 실측과 복원 설계에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국은행본관 복구 설계 감리, 한양물산 사옥, 탑골공원 삼일문, 공주감영 보수공사, 칠백의총 보수정화공사, 법주사 원통보전 보수공사, 경주사적지 종합조경공사, 광화문 복원공사, 전통 한옥 형태로 설계한 호암미술관 등이다.
우리말 건축용어집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지 30년 후, 회갑의 나이에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바로 <한국건축대계>였다. 창호, 벽돌, 단청, 용어, 목조, 기와, 석조, 재료 등 8권으로 구성된 책들은 여전히 문화재수리기술자들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어찌 보면 그가 걸어온 건축 행로는 비주류의 길이었다. 엘리트의식이 강했던 경성고공 동창들이 조선총독부나 철도국에서 근대건축 관공사를 했을 때, 그는 조선공영주식회사에서 조선인이 거주하는 도시형 개량한옥을 지었다. 지금이야 북촌 한옥이 각광을 받지만 당시 잘 나가던 선배 건축가들은 집장사 집쯤으로 낮게 보았다.
광복 후 미군정기에는 다들 미군 관련 공사를 하거나 토건업을 벌일 때 그는 우리말 건축용어 정리에 매달렸다. 한국전쟁 후 건축학과가 늘어나면서 동료들이 대학교수가 될 때 그는 실무를 하며 건축교재를 만들었다.
경제개발 시기에 서구 국제주의 건축이 유행할 때 그는 전통건축을 연구했다. 용어가 지식이라던 그는 번듯한 건축 대신 많은 사람들이 건축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토대를 다졌다.
오래전 그의 동료들이 지었던 건물은 이미 많이 사라졌다. 그가 건져 올린 용어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거푸집, 까치발, 서까래, 붙박이, 담벼락, 줄눈, 호박돌, 지게문, 너새, 들보, 졸대, 뼈대, 멧쌓기, 사춤쌓기, 반자, 장지, 쇠시리.....그리고 그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진 아름답고도 넉넉한 낱말 '배흘림기둥'도.
1974년 대한건축학회지에 실린 그의 글 '건축용어의 낙수(落穗)'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한글날을 맞을 때마다 우리에게 영광의 빛을 던져 주신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당시의 국민들의 염원을 이제 우리가 누린다고 보면, 한량없이 고맙고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더욱 바르고 알기 쉽게 표현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 믿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