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리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막상 봉사의 기회가 있으면 현실의 무게감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도 봉사공고를 보고 밤잠까지 설쳐가며 고민하던 나에게, '하늘에 가까이' 팀의 임채홍 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봉사는 네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마음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재능은 다른 사람과 합치면 되는 거야."중요한 것은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말에 나의 부담감은 많이 덜어졌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는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나섰다.
이번 활동은 "나의 재능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인 '하늘에 가까이'와 함께했다. 이들은 지난 5년간 캄보디아 시골지역에서 5회에 걸쳐 의료 및 일반 봉사활동을 수행해왔으며, 3회 차부터 LG 전자가 이들의 꿈을 후원하고 있다. 올해는 의료팀 7명과 일반팀 5명을 포함한 총 12명의 봉사자들이 2월 18일부터 24일까지 6일간 캄보디아의 시골인 크썸(Khsoem)에서 의료봉사와 유아교육봉사를 수행했다.
크썸에서 만난 작은 꿈나무들캄보디아에서 선교 활동 중인 이창원 신부는 이 곳에서 전기도, 수돗물도 없이 우물물에 의지해 생활하는 열악한 현실을 마주했다. 가장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맨발로 마을 안을 뛰어다니고 나무를 타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아이들은 미래를 꿈꿀 권리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시급해 보였다. 그래서 신부님은 성당과 함께 이 곳에 작은 유치원을 세웠다. '하늘에 가까이' 단원들이 만나게 될 아이들은 이곳에 있는 5살, 6살의 작은 꿈나무들이었다.
첫 수업은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 쉬운 영어동요로 문을 열었다. 생소한 노래에 가만히 귀 기울이던 아이들이 노래가 반복되자 하나 둘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내 한 소절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몇 소절 불러보고 제법 노래에 익숙해진 몇몇 아이들은 앞에 나와서 불러보겠다고 손을 번쩍 들기도 하였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따라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이 순간이 서로의 가슴에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서로의 얼굴은 잊힐지라도, 함께 부르던 노래가 떠오를 때면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수업이 낯선 아이들아이들의 노래로 한창 흥이 오르려 할 때쯤 난데없이 수업이 중단됐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현지 선생님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쉬는 시간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에 시간을 확인하자 수업을 시작한 지 30분도 안 되었다. 일단 쉬기로 하고 손가락으로 시계 바늘을 돌려가며 다음 수업시간을 정하는데, 선생님들이 원하는 시간이 무려 1시간이 아닌가. 준비해간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손짓, 발짓, 몸짓을 다 동원해 설득한 끝에 선생님들은 30분의 쉬는 시간을 받아들였다.
사실 신부님의 열정으로 이곳에 유치원을 세우긴 했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선생님은 구할 수가 없었고 지금 있는 선생님들 또한 아이들의 안전을 돌보는 역할에 그치고 있었다. 아이들도 집안 사정에 따라 유치원에 오는 날이 들쑥날쑥하고, 시시때때로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하는 등 규칙적인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30분 가까이 진행되는 수업은 무척이나 낯설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마냥 즐거워하며 나무에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재잘거렸다. 티없이 맑은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대비되는 이 곳의 열악한 교육여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들이 성장하며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할 텐데, 이곳의 현실은 참으로 녹록지 않아 보였다.
잊지 못할 첫 작품을 만들다새로운 수업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이 가장 반짝였던 시간은 모자이크 수업이었다. 수업에 쓸 색종이와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여주자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은 더욱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막상 모자이크 방법을 설명해 준 뒤 직접 해보라고 하자, 아이들은 한동안 색종이만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낯선 수업 방식에 당황해서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색종이를 하나씩 찢어가며 함께 붙여주니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이 풀리고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본 아이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는 자기 작품을 손에 꼭 쥐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아이들 작품에 이름을 적어 칠판에 붙여주자 아이들은 연신 탄성을 질러가며 칠판에 있는 자기 작품을 가리켜댔다. 모자이크 수업 하나에 이렇게까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뭉클했다. 한국에서 모자이크는 흔한 수업 활동 중 하나인데, 이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새롭고 신기했던 것이다.
마술에 걸린 크썸 아이들이번 봉사 활동에는 마술사로 활동하고 있는 단원이 함께 했다.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그의 재능은 아이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한시도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지 못하던 아이들이, 마술 공연이 시작되자 꼼짝 않고 마술사의 손놀림에 온신경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마술사 손바닥 위에 팽팽하게 놓여져 있던 기다란 밧줄이 '후'하는 입김에 반으로 접히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세를 몰아 이번엔 컵에 물을 담아 그대로 얼려버리니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박수를 쳐댔다. 어느덧 교실 안은 마술사의 손짓 하나라도 놓칠 새라 눈도 깜빡이지 않는 아이들의 동심으로 가득찼다.
보이는 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은 투명하게 빛이 났다. 그 마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보여지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아니 믿어서는 안 되는 어지러운 어른들의 세계가 떠올랐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반짝이는 순수함을 잃고 의심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인지.
보이는 대로 믿을 수 있는 세상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세상,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때묻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니 나도 이들의 순수함에 물들어 가고 있었나 보다. 세상이 더 따뜻해질 수 있도록 그가 진짜 마술을 걸어줬으면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희망의 꽃으로 뒤덮인 세상을 꿈꾸다늘 그렇듯, 행복한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어느덧 헤어짐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함박 웃음을 지으며 유치원 안팎을 뛰어 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간도 어김없이 흐르고 세상의 풍파를 만나는 날도 다가오고야 말 것이다. 아이들이 거친 세상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썸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이 한 줄기 희망에 우리의 따뜻한 관심이 햇살처럼 쏟아진다면 언젠가 희망의 꽃으로 뒤덮인 세상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