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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 연휴다. 추석 연휴 일주일 전부터 길거리 여기저기 내걸린 펼침막들이 명절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사는 전북 군산에서는 9월 23일 즈음부터 거리 곳곳이 펼침막 모드로 바뀌기 시작했다.

펼침막에 새겨진 짤막한 문구에도 세태와 시류의 풍향이 담겨 있는 듯하다. 보고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며칠 전 퇴근길이었다. 교차로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던 중 인상적인 문구가 담긴 펼침막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할게.'
 
 펼침막에 눈길이 갔다
펼침막에 눈길이 갔다 ⓒ 정은균

명절 가부장제 풍습, 더 이상 두고볼 순 없어

올해 추석은 역사상 유례없는 긴 연휴 기간을 자랑한다. 물경 10일이다. 평상시 결행하기 힘든 국외여행을 길게는 열흘짜리로 다녀올 수 있다. 가족끼리 장거리 캠핑을 다녀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고향 부모님 찾아 인사드리고 조상 성묘하는 '진짜' 명절 쇠기는 잠깐이면 된다. 펼침막 문구가 말해주는 것처럼 시아버지까지 나서서 기꺼이 부엌일을 할 것 같은 분위기도 있다. 집안 여자들이나 젊은 며느리들 명절 쇠기가 예전처럼 힘들거나 답답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될까. 예의 펼침막 문구에서처럼 설거지하는 시아버지들이 많아진다면 '명절 적폐'니 하는 살벌한(?) 말들이 설 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전한 현실이 있다. 명절 음식 장만하기나 차례 준비 등 크고 작은 부엌살림 책임은 대부분 여자에게 있지 않은가.

지난 설 연휴 즈음 <오마이뉴스>와 개인 블로그에 '"아빠는 아빠 집, 엄마는 엄마 집으로 가요"'라는 제목의 글 한 편을 올렸다. 남자 집 우선의 명절 문화를 돌아보자는 취지의 글이었다.

어떤 경위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최근 내 개인 블로그에 올려놓은 이 글의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평소 블로그 전체의 일일 평균 조회 수가 200 정도였다. 지난 며칠간 이 글을 조회한 사람이 20만여 명이 넘었다.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 지난 10여 년간 명절을 남편인 글쓴이 집에서 먼저 쇠는 순서로 했으니 앞으로는 아내 집에 먼저 가 명절 당일을 보내라는 권고가 많았다. 전체적으로 아내 입장과 처지를 챙기고, 처가에서 명절 쇠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라고 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조회 수와 아내와 처가를 잘 챙기라는 댓글들의 기조를 보면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것이 있었다. 남자와 남편 중심으로 굴러가고 유지되는 우리나라 명절 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 같은 것이었다.

오늘 교무실에서 몇몇 여선생님과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명절 적폐' 1순위가 무엇인지 여쭸다. 50대 중반의 한 선생님은 사람들 의식이나 명절 풍습이 많이 바뀌고 있어서 '적폐'라고 할 만한 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선생님은 시댁에 먼저 말씀을 드려 명절 당일 차례를 친정에서 보내고 계신다.

나이가 30대 중반인 다른 여선생님은 명절 음식을 여자들이 떠맡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적폐 중 적폐라고 말씀하셨다. 음식 장만하는 여자들 옆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여자들이 번거로워할지 모른다며 우르르 밖에 나가버리는 남자들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울컥해 하는 표정이 읽혔다.

명절 문화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태도가 바뀌고 있다. 남편 본가에서 명절 당일을 보내는 관행을 버리고 남편 집과 아내 집을 번갈아 가며 명절 당일을 보내는 집이 많다. 명절 장 보기부터 음식 장만까지 여자들과 함께 손을 합치는 남자들 모습도 이제는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남편들은 본가에서 명절을 먼저 보내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명절 연휴에 처가 나들이를 아예 하지 않는 집도 있을 것이다. 명절 장 보기나 음식 장만 역시 대부분 여자몫이다. 거실 한쪽에 차려진 술상을 옆에 두고 화투를 치는 남자들, 그 한쪽에서 전을 부치거나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여자들이 어우러지는 집안 풍경이 아직도 우리나라의 명절 이미지를 대표한다.

남자들이 명절 문화 바꿔야
 
 차례상
차례상 ⓒ Pixabay
조선 초기에만 해도 남자들이 차례상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홍동백서(紅東白西)니 조율이시(棗栗梨柿)니 하는 상차림 법 역시 조선 후기 양반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생겨난 새로운 형식이었다고 한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되풀이는 전통 관습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편이 아내와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상 준비를 하면 어떨까. 상차림을 간소하게 해도 되니 음식 장만도 적당히 하면 된다. 명절 당일 먼저 처가에 가는 것도 아주 좋다. 명절 증후군으로 우울해하고 몸과 마음이 힘들어 트라우마까지 겪는 아내(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이제는 우리나라 남편(남자)들이 진심으로 더 인정했으면 좋겠다.

결혼한 지 이틀 후 충격 속에서 추석 명절을 쇠게 됐다는 어느 독자의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남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여자들이 그 상에 밥그릇을 들고 가 식사를 하는 전근대적인(?) 관습이 아직 남아 있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결혼과 동시에 부계사회의 노예가 되었구나"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그 독자는 명절이나 제사만 하면 심리상담소를 찾아가 일시적으로라도 위로를 받고 싶어할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 효자들을 비꼬는 말로 '셀프 효도'가 있다. 남편이 직접 부모에게 효도하지 왜 아내를 시켜서 하고 뒤에서 자신이 뿌듯해 하느냐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 효도하자'라는 말도 비슷하게 쓰인다. 죽은 조상 제사에 집착하는 우리나라 남편들이나 명절 풍습을 꼬집는다.

두루 공감한다. 효도와 제사 모두 살아 있는 가족들 간의 교감과 관계 맺기에 본질이 있다. 명절에 치르는 관례적인 일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찬찬히 따져보자. 조상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식구들 모두가 주인공이 되게 하자. 후손들이 불편해 하고 힘들어 하는 명절이라면 조상들도 유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남편,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기쁘고 즐거운 명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명절 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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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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