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재개하되, 원자력 발전 자체는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471명의 '작은 대한민국'인 시민참여단이 2박3일간의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다. 혹자는 첨예한 사회적 갈등 속에서 치유와 위로를 선물한 "신의 한수"라며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원자력 관계자들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반영된 결과라며, '비전문가'들에게 중차대한 국가 정책을 내맡긴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의 백미는 최초 여론조사→전문가 토론 청취→시민참여단 상호토론→전문가 질의응답→최종 여론조사로 이어지는 시민참여단의 2박3일간 숙의 과정이다.
필자는 그 현장에서 시민참여단의 상호토론을 진행하는 모더레이터와 질문취합팀으로 활동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이후 시민들의 공론조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와 관련된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문답 형식으로 재구성해봤다.
Q. 공론조사가 뭐죠? 여론조사랑 뭐가 다른가요? A. 공론조사는 요약하자면 "숙의 과정을 거친 국민여론조사"다. 통상적 여론조사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주제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수동적 참여 방식에 의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방식이라면,
공론조사는 주제에 대한 관심(attention)이 있고, 관련 정보(information)를 충분히 제공받은 시민이, 주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토의(deliberation)를 한 후 형성되는 의견의 추이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라면 한 봉지를 사도 가격을 비교하고, 성분을 따져보는데 하물며 전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충분한 정보와 공부의 기회도 없이 판단을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공론조사의 핵심은 '논쟁'이 아닌 사안에 대한 '학습'이다. 최소 2회 이상 설문을 실시하고, 그 사이에 학습 및 토론의 과정을 넣는 이유다. 1차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의견분포와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고려하여 조사 응답자 중 대표성을 갖춘 토론자를 선정한다.
이렇게 선정된 시민참여단은 10여 명으로 나누어 소그룹을 구성한 후 조사 주제를 놓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주제에 대해 찬반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청취하며, 자신의 의견을 만드는 '공론' 형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 설문조사와 학습 과정 이후에 동일한 조사를 진행한 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의사변경(opinion change)'을 확인하는 것이다. 향후 정책 결정에 중요한 고려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Q. 이렇게 전문적이고 중요한 사안을 비전문가들에게 결정하라니, 시민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A. 공론조사 때마다 나오는 단골질문 중 하나다. 일단 공론조사는 갈등 예방에 초점이 맞춰진 프로세스다. (이번 신고리의 경우는 갈등 발생 이후 진행된 케이스지만)
원자력 에너지 문제는 당사자가 전국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말은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더라도 결국 그 정책의 영향을 받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뒤에, 무엇을 염려하고, 그래서 어떤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지 미리 확인하는 것은 갈등 예방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론조사 때마다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비전문성이다. 심지어 이번 시민참여단 중에도 "전문가들이 알아서 정하지 왜 물어보냐"고 툴툴대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초반에만. 2015년 사용후핵연료 공론조사에 참여했을 때도, 주최 측이나 전문가들의 우려는 이렇게 전문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일반 시민들이 과연 몇 시간 동안 학습하고 제대로 이해가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당시는 1박2일로 진행됐다.
주제에 대한 이해도를 가늠하려면 질문의 수준을 보면 된다. 당시 시민들은 핵심적 논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상당히 예리한 질문을 던져 현장에 있던 전문가들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신고리 종합토론회를 참관했던 한 기자는 "웬만한 기자들 질문보다 날카롭더라"고 평했다. (물론 이부분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반대 평가도 나올 수 있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계속 자기 의견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시민들이 사안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다.
Q. 공론조사 결과로 정책이 집행되면, 공론조사가 정책 결정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거 아닌가요? A. 공론조사의 핵심은 결정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돕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공론조사의 결과가 정책 결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이번 신고리5·6호기 공론조사 결과가 박빙으로 나왔다면, 문재인 정부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론조사를 무조건 정책 결정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우려와 비판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2011년 진행한 신호등 공론조사 사례가 대표적 예다. 경찰청은 기존 4색 신호등 대신 3색 신호등 도입 문제를 놓고 공론조사를 진행했다.
관련한 쟁점에 대해 학습하기 전에는 3색 신호등 도입에 대해 반대 의견(69.8%)이 찬성 의견(27.1%)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숙의 과정을 거친 후에는 찬성(50.0%)과 반대(49.0%)가 팽팽한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 경찰청이 찬성이 더 많아졌다는 이유로 3색 신호등 도입을 결정했을까. 경찰은 고심 끝에 3색 신호등 도입을 포기했다. 시민참여단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과 질의응답의 시간을 거쳤음에도 시민들이 정책에 충분히 동의하지 못했다면, 정책을 그대로 집행했을 때 발생할 영향과 갈등의 파장이 어떨지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하고 이를 감안해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Q. 공론조사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시민참여단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인지요? A. 이런 공론조사 과정을 통해 국내외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사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공론조사 과정을 거치면 '잘모르겠다'는 판단 유보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외에서 진행된 공론조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덴마크에서 '유로화 도입에 따른 공론조사'를 진행했는데, 1차 조사에서는 '모르겠다'는 응답은 19%였지만, 최종 조사에서는 10%로 줄어들었다. 이런 현상은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초 조사에서 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5.8%가 판단을 유보한 반면, 최종 조사에서 판단을 유보한 비율은 3.3%로 10분의1에 불과했다.
둘째, 국내외 공론조사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 중 하나는 결과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게 된다는 점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결과에서 '최종 결과가 내 의견과 달라도 존중할 수 있다'가 93%나 나왔다.
2007년에 부산북항만개발 관련 공론조사를 했는데, 이때 참여한 사람들에게 "내 의견과 다른 결론이 나오더라도 수용하겠다"는 의견이 80%에 달했다. 이번 신고리 공론조사 과정에서도 적어도 참석자들 중에는 수용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는 반응이 다수 나왔다.
그래서 갈등 현장에서 자주 회자되는 경구 중 하나가 "무엇이 정답이냐가 아니라, 함께 찾는 게 정답"이라고 말한다. 이번 공론화 과정의 핵심은 참여와 숙의를 통해 시민들이 함께 정답을 찾아간 과정이라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이번 신고리 공론조사 뿐 아니라 과거 여러차례 공론조사에 참여했습니다. 2014. 11. 국민대통합위 주최 ‘대한민국 국민에게 길을 묻다, 2014 국민대토론회’ (퍼실러테이터) 2015. 4. 사용후핵연료재처리’ 공론조사 (퍼실러테이터) 2016. 3. 국민의당 숙의배심원제 후보 경선 (기획 참여 및 퍼실러테이터) 2017. 10. 신고리5.6호기 시민참여단 종합토론회 (모더레이터 및 질문 취합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