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골집을 갈 때마다 '곰'을 본다. 미리 생각했을 때는 가다가 속도를 늦추고 들여다보거나 지나치고 나면 차를 세우고 안부를 전한다. 이렇다 보니 그 곰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친구, 숨을 쉬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있으니 내게는 살아 있는 것과 진배없다.
가을이 성큼 뒤란으로 내려앉은 뒤 끝, 길을 가다가 슬픔에 젖은 눈동자를 만났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곰은 비에 젖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우수어린 검은 눈동자로 강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멈추고 그 앞에 서 말없이 한참동안 대화를 나눴다.
강물은 불어 강둑이 넘치도록 흐르고 있었다. 쓸쓸한 아스팔트에는 벚나무 이파리가 무수히 떨어져 날리고 하늘은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 푸르게 맑았다. 인적 없이 새들만 날갯짓하고 이따금 건듯 부는 바람에 늘어 선 나무들이 손을 흔드는 그 곳. 내가 서 있는 땅이 세상의 끝인 양 외롭고, 마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한없이 허전했다. 그런 우수가 든 까닭은 아마 그 친구가 눈빛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해준 탓이었으리라.
지난봄이었다. 강에서 뻗어 오른 그곳에 밭을 일구고 무엇인가를 심던 노인을 설핏 본 적이 있었다. 흙이 흘러내리자 노인은 돌들을 주워 석벽을 쌓더니 어느 날에는 밭에 엎드려 작물을 심는 것 같았다. 그것이 콩이었던 모양이다. 뜨거운 여름날 콩잎이 무럭무럭 자라고 알이 들어차자 그 밭에 십자로 묶은 나무에 검은 비닐을 씌운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박은 막대기에 꽁무니를 찔러 세운 하얀 곰 인형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처음 그 모습의 곰을 봤을 때는 그 놀라운 기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여름이 지나며 그 모양이 점차 바뀌어 갔다. 묘하게 어이없다는 표정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슬픔을 띄기 시작했다. 햇볕을 받아 색깔이 진해지고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고개를 숙이면서 표정이 바뀌었을 테지만 내게는 그런 변화가 한 편의 장중한 시처럼 다가섰다.
삶의 근원을 암시하는 아포리즘이 글이라는 형식을 벗어나 행위로 나타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리하여 혹시 이 친구,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 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롯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변하며 나에게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그곳에 서서, 뱀처럼 구부러지는 강줄기를 따라 내 삶의 연원을 거슬러 오르는, 찰랑거리는 강물을 바라보며 나누는 경건한 대화. 마치 어머니를 생각하며 듣는 저녁 종소리와 같았다.
내 본래의 면목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다. 곰은 내게 사색 말고 또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외로움 말고, 슬픔 말고 또 어떤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일까. 나는 언제나 저런 모습이 되어 바람 따라 흔들리는 풍경(風磬)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이라고 묻는 내가 너무나 속수무책으로 바보 같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영산강으로 모여드는 화순의 샛강, 지·석·강. 낡은 국도를 꺾으면 오래 전 보성 가는 도로의 어느 모퉁이, 우산처럼 펼쳐진 느티나무가 있고 그 나무 아래 평상 하나가 어머니를 기다리는 누이인 양 쪼그리고 있는 길. 멀리서 쳐다보면 몸을 흔들며 꿈처럼 다가서 손짓하는 강.
길은 몰랐을 것이다. 하늬바람이 후두둑, 가을처럼 내려앉고 비라도 한 줄금 시작하면 해거름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르던 오래된 누이의 손짓처럼, 마음이 연이 되어 둥글게 떠오르다가 산 너머 샘물처럼 고인다는 것을. 길의 중간,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콩밭이 있고 거기 내 친구 곰이 서 있다.
사람의 사연이라는 게 별 거 아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마음속으로 덧없음까지 깊어질 때 내 친구를 만나러 오시라. 그대는 가고 그대가 품은 꿈결 같은 과거가 출렁출렁 다가설지니. 아무도 없을 때 내 친구 곰을 보고 가시라.
덧붙이는 글 | 벌써 겨울입니다. 가을의 끝자락에 본 곰과 지금 곰의 자리가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서서 곰을 내려다 보곤 합니다. 돌아서 흘러가고 있는 강물도 봅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갈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