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문자 메시지다. 발신자는 '아바마마'. 1999년, 처음 휴대전화를 가졌던 때부터 줄곧 아빠는 '아바마마'로 저장돼 있다. 휴대전화에 '아바마마'가 찍히지 않은지 7년이다. 아빠가 두 번째 뇌출혈로 쓰러지고, 지난 7년간 아빠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물론, 문자메시지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딸아, 사랑해. 아빠가."무슨 일이지 싶었지만 확인은 나중, 나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빠, 나도 사랑해요."아빠는 뇌병변 2급 장애인이다. 언어장애와 부분적 운동장애가 있고, 뇌출혈로 청신경이 손상돼 소리를 전혀 못 들으신다. 듣지 못하시니, 말도 어눌해졌고, 당연히 대화는 어렵다. 간단한 의사소통을 위해 문자메시지 사용법을 알려드리려 했지만, 아빠는 번거롭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요즘 아빠가 장애인복지관에서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신다고 한다. 딱 봐도 아빠 말투가 아니었다. 누가 써준 문장, 그대로 베껴 옮긴 티가 나는 아빠의 첫 문자가 내게로 왔다.
오늘도 동문서답... 그래도 오늘 아빠는 환한 미소
아빠가 소리를 잃은 후, 나는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빠에 대한 글을 써보고, 아빠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성이던 걸음, 주춤하던 마음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글을 쓰고, 책과 학인들의 글을 읽으며 자주 아빠를 생각했다. 글로 상황을 정리하니, 삶도 챙겨 볼 의지가 생겼다.
며칠 전, 그 첫 시도로 아빠가 복지관 가시는 길에 동행했다. 친정에 도착해 문을 열고 인기척을 내며 집으로 들어가도, 아빠는 알아차리지 못하신다. 톡톡, 손으로 아빠 어깨를 치자 그제야 돌아보신다. 아빠와 함께 차에 탔다. 안전벨트를 매시라는 말도, 문을 닫아달라는 말도, 모두 동작으로 표현해야 한다. 운전 중 길이 헷갈려 입 모양을 최대한 크고 정확하게 해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주차장이 어디에요?" "응? 좌회전. 좌회전 해." "아빠, 치료실은 몇 층이에요?" "10시." 입모양만으로 하는 의사소통은 쉽지 않다. 오늘도 동문서답. 내 마음이 앞서간다고 현실까지 따라주는 건 아니다. 현실은 늘 제자리걸음.
아빠와 도착한 곳은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2층, 생활치료실. 치료가 시작됐다. '일주일 잘 보내셨어요?'라고 치료사가 종이에 써서 건넨 질문에 '그냥' 하고 옅은 미소를 짓던 아빠가, '옆에 누구랑 오셨어요?'라는 질문에는 '우리 딸' 하며 환한 미소를 보이신다. 얼굴 가득 번지던 미소에서 아빠의 마음을 눈치 챈다. '아빠, 나랑 와서 정말 좋구나.'
'소리를 잃은' 아빠와의 인터뷰치료가 끝나고,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별 것 아닌 일상. 필요나 의무가 아닌,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아빠 편찮으시고 나서 처음이다. 아빠도 싫지 않은 눈치다.
"아빠랑 얘기 좀 하려고." "아이고, 뭔 얘기, 난 몰러." '난 몰러.' 아빠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해도 몇 번 듣다 못 알아듣겠으면, '난 몰러', 종이에 써서 말을 전해도 읽기 귀찮거나 힘들면, '난 몰러'. 모르겠다는 아빠를 모시고 카페에 갔다. 연인들이나 하는 행동인데, 연애할 때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인데, 나는 아빠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써서 아빠에게 말을 건네기에 마주보고 앉는 거리는 머니까.
"아빠는 언제 서울에 왔어?" "나? 그때가 19살쯤 됐나?" 잠시 눈을 감고 회상하더니, 아빠가 이야기를 잇는다.
아빠는 해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광주에 갔다. 내 학창시절, 엄마는 부모 학력 기입란에 항상 '고졸'이라고 썼는데, 그게 거짓말이란 것쯤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은 건 처음이다. 아빠는 국졸. 배움은 없었지만 기술은 있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13살 어린 소년은 광주로 가 미싱일을 배웠다. 그리고 19살 때쯤 광주에서 서울로 와 재단을 배우며, 일을 했다.
맞춤옷을 많이 입던 시절, 아빠는 재단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명동에서 의상실도 했고, 백화점에 입점 된 유명 브랜드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실력도 있었고, 감각도 있던 아빠, 두툼한 아빠의 손에서 맵시 있는 옷들이 만들어져 나왔다. 어릴 적부터 결혼 전까지 중요한 때마다 아빠가 만들어준 옷을 입었다. 재롱잔치 때 입었던 새하얀 드레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입었던 남색 코트, 성인이 돼 입었던 첫 정장, 대학 졸업사진 찍을 때 입었던 아이보리 색 투피스 그리고 결혼 예복까지 모두 아빠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늙고 아픈 아빠의 두꺼비 같던 손은 이제 더 이상 옷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시침질처럼 듬성듬성, 아빠의 어눌한 말이 짧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나는 조각조각 이어 붙이듯 아빠의 어린 시절 퍼즐을 맞췄다. 다 맞춘 퍼즐에선, 어린 나이에 혼자 타지에 와 일하며 삶을 꾸려가던,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아빠의 고된 외로움이 보였다.
"아빠 많이 힘들었겠다, 어린 나이에." 난 아빠에게 가 닿지도 않을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 들려 답답하지?"... 아빠의 대답은
써서 질문을 던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이해하기 쉬운 질문과 짧은 답변만 오갔다. 나 태어났을 때를 물었을 때는 아빠는 또 한 번 웃었고, 엄마를 만났던 얘기를 하실 땐 그보다 더 밝게 웃었다.
"엄마 참 예뻤어.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집까지 따라갔어." 제대로 결혼식도 못 올리고, 같이 산 세월이 40년이다. 사는 게 고되서였을까, 나 어릴 적 우리집은 화목한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아빠가 병들고 나니 엄마는 아빠의 손과 발, 이젠 귀와 입까지 됐다.
"니 엄마가 고생 많았어. 돈이 없어서." 이번엔 아빠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우리 집은 왜 망했는지, 술은 왜 그렇게 드셨는지 물었더니 이번엔 씁쓸한 미소로 긴 설명을 대신한다. "난 그냥 그렇게 살았어." 체념하듯 내뱉은 아빠의 말. 할아버지, 고모, 작은 아빠를 해마다 차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아빠는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그게 내겐 대답이 됐다.
"소리 하나도 안 들려 많이 답답하지?" 답답해 힘들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아빠의 대답은,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뭐." 그냥 그렇게 살았다던 아빠는 이제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한다.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살아지는 생. 그런 생 굽이굽이가 궁금한데, 자세히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온 아빠의 삶에도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고 했다. 고향에 머물 곳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고향에 왔다갔다 하며 지내고 싶다고.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 멀어서 잘 가지도 못하는 고향, 아빠는 고향을, 그 바다를 쭉 마음에 품고 사셨나 보다. 그곳엔 고생스러운 지난 시절이 아닌, 무얼 몰라 행복했던 아빠의 유년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7년만의 대화아빠를 만나고 오던 날, 집에 거의 도착해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운전이 자신 없는 난 어지간해선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한 할아버지가 앞서 가시는데, 천천히 뒤따라가도 도통 비킬 생각이 없으신 것 같다. 경적을 울려야 하나 몇 번 고민하다 그냥 뒤따라갔는데 얼추 몇 백 미터 되는 거리를 가다 보니 조금씩 짜증이 났다.
'아니, 좀 비켜주지. 왜 저렇게 대책 없이 앞에서 막고 있는 거야.'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아, 저 어르신도 우리 아빠처럼 못 듣는 분일 수 있겠구나.' 그 이해만큼 아빠에게 한걸음 다가간 건지, 아빠에게 다가간 걸음만큼 이해가 깊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맹추위가 기승이었던 며칠 전,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날씨가 많이 추워요. 따스하게 입고, 감기 조심하세요." 조금 뒤, 답장이 왔다.
"딸아, 고맙다."아빠는 한 번도 나를 '딸아'라고 부른 적이 없다. 오늘도 누가 적어준대로 보고 쓰신 게 분명하다. 어색하고 짧은 메시지지만, 아빠가 내게 말을 건다. 7년 만이다. 나는 아빠의 삶에 발걸음을 내딛고, 아빠는 내게 말을 건넨다. 변한 건 없지만 서성이던 거리는 그만큼 좁혀졌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로 더듬더듬 걸어 들어간다. 두려움 한 겹 벗겨낸 채, 조금씩 아빠의 삶으로. 이제야, 이제라도 걸어서 간다. 소리 없는 세상이지만, 아직은 아빠에게 말을 건넬 수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