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24시간 연결된 시대, 그럼에도 '단절'을 선택하는 삶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스마트폰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
나는 지금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앞으로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기 이젠에 나는 피처폰으로 SNS도 하고 이북(e-book)도 읽고 포털 검색도 했다. 속도도 느리고 웹 화면의 가독성도 매우 떨어졌지만 인터넷에 기반을 둔 핸드폰의 여러 기능을 쓸 수 있는 나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느낌이랄까? 그리러다 스마트폰을 샀다.
스마트폰을 잘 쓰고 싶었다. 스마트폰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거라고 믿었다. 과학 기술의 진보가 곧 삶의 진보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을 알리고 스마트폰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도왔다. 웹을 기반으로 컴퓨터와 핸드폰을 연결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스케줄러를 연동하고 이메일 계정을 핸드폰에 등록하고... 그뿐인가. 모든 자료가 자동으로 클라우드에 축적되는 것도 좋았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SNS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그 즈음엔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 같은 것은 아예 보지 않았다. SNS에 내가 관심있는 뉴스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런 뉴스들을 퍼나르면서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서로 알지 못하지만 정보를 공유하면서 연대감을 키웠다. 특정 이슈가 생길 때마다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나도 같은 생각이야'라고 말하면서 힘을 모았다. 외롭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연대는 집회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와 같은 정보를 공유하면서 오프라인으로 확대되었다. 나와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었고 힘이 났다. 사회운동이 무겁고 심각하지 않았고 즐겁고 유쾌했다. 촛불집회가 축제와 같았던 것도 이쯤이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 기술은 점점 빠르게 발전했다. 들고 다니는 컴퓨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스크톱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8g면 충분했던 스마트폰 용량이 나중에는 64g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최신 스마트폰을 샀다. 2012년경 새로 출시되는 스마트폰을 예약까지 하면서 샀다. 세 달쯤 썼을까.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어느날,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다. 스마트폰으로 라디오를 듣다가 가방에 넣었는데 가방을 제대로 잠그지 않아 그 틈에 누가 가져가 버린 것 같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분실신고를 하고 클라우드에 내장된 위치찾기 시스템을 가동했지만 마지막 위치는 지하철 안이었다. 누군가 핸드폰을 가져간 후 전원을 껐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서 달라진 삶
그렇게 우연히 스마트폰과 단절되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일주일 동안은 아예 핸드폰 없이 살았고 그 다음 일주일은 집에서 쓰던 인터넷 전화기를 들고 다녔다.
핸드폰이 보편화되면서 공중전화가 많이 없어졌다. 핸드폰 없이 지낸 일주일 동안 공중전화 부스를 찾느라 헤매다가 떠올린 묘수가 인터넷 전화기였다. 사실 와이파이가 없으면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아주 유용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핸드폰 없이 지내면서 비로소 내가 얼마나 스마트폰에 의존하면서 살았는지가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기 전 나는 인터넷 무제한 요금을 썼다. 당연히 그래야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으니까. 스마트폰 덕분에 쉬지 않고 유비쿼터스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없으니 내 삶도 달라졌다. 버스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만날 들고만 다니던 책도 읽게 되었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멍 때리는 시간도 많아졌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색하고 불안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약속을 하면 무조건 지켜야했다. 나도 상대도 그랬다. 생각해보니 핸드폰을 들고 다닐 때는 쉽게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SNS 메신저는 전화나 문자에 비해 연락하는데 부담이 없어 말걸기가 쉽다. 약속시간 직전에라도 연락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없으니 일단 집에서 출발하고 나면 연락할 방법이 없다. 약속시간에 늦거나 약속을 취소하려면 적어도 내가 집에서 나서기 전에 연락을 해야했다. 경기도에 살고 있던 터라 1~2시간 전에는 연락을 해야했다. 그뿐인가.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1~2시간 동안 만남에 대한 의식(儀式)을 잠시라도 하게 된다. 연락을 즉시 할 수 없다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덕에 누군가와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을 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儀式)이 필요하거든."
- <어린왕자> 중에
스마트폰이 있을 땐 어느 경로가 가장 빠른지 수시로 검색하고 최단 경로를 이용했다. 버스와 지하철의 도착시간을 비교해보고 좀더 효율적인 교통수단을 선택한다. 또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확인하고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활용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이 없을 땐 그저 마음이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어느 날엔 버스가 타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리 방법이 없다. 초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쓸래야 쓸 수가 없었다. 길거리에서 버리는 시간이 많았다. 이상하게 그렇게 버리는 시간들이 좋았다. 여유를 찾았다고 해야 할까? 일분일초에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2주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핸드폰 없이 지내면서 '스마트폰은 정말 스마트한 것일까?'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 나를 스마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분일초도 쉴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을 분실한 이후 나는 한동안 남들이 쓰다가 버린 스마트폰을 받아서 썼다. 속도가 느려서 몇 가지 기능을 제외하고는 거의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스마트한 스마트폰의 세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의 속도와는 다르게 핸드폰 세계의 스마트함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 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도 무너졌다. 사람들은 경계의 사라짐을 편리함과 효율성이라고 해석했다. 나는 경계의 흐릿함이 불편했고 지켜야할 선을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만 같았다.
퇴근 이후 회사와 '연결'이 끊긴 내 삶을 찾다스마트폰은 모든 관계를 쉽게 만든다. 개인적인 관계 뿐 아니라 공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전화나 문자와 다르게 비용이 들지 않고 채팅창과 같은 포맷의 SNS는 상대적으로 쉽게 말을 걸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주로 친목도모 용으로 활용되던 카카오톡 단체방, 네이버 밴드, 온라인 카페 등이 업무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페이지도 그렇다. 점점 일과의 분리가 어려워졌다. 오히려 일이 놀이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일과 놀의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고 노는 것처럼 일하는 것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아주 소심한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칼퇴'다. 우리나라는 절대적으로 근로시간이 길다. 너무 많은 시간을 일을 하는데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나로 존재하는데 여가와 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 보는 인적자원이라는 말에 반대한다.
그 때문에 야근은 정말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만의 소심한 노동운동은 스마트폰의 스마트함 때문에 점점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너무나 스마트해진 스마트폰 덕분에 퇴근을 해도 업무와의 연결이 너무나도 쉬웠기 때문이다.
핸드폰은 어쨋든 개인의 사적 영역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SNS 메신저는 사담을 나누는 공간인 동시에 업무를 지시하고 보고하는 데도 사용된다. 사적 기능과 공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므로 퇴근 이후 나의 몸은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지만 업무와 관련된 연락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SNS로 개인 메시지를 시간이 몇 시든 보낼 수 있다. 근무 시간이든 퇴근 시간 이후이든 상관없다.
언젠가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에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를 다룬 적이 있다. 그것은 스마트 기기의 발전으로 상시적 업무가 가능해짐에 따라 노동자의 여가 시간 및 사생활 보호를 목적으로 업무 시간 외에 업무와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는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연결의 용이함은 업무의 상시성으로 이어진다.
항시적 연결이 항시적 업무로 이어져 노동자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닌가 보다. 프랑스에서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 노동개혁법이 2017년부터 시행중이다. 어떤 자동차 회사는 회사 이메일이 퇴근시간 이후에는 닫힌다고 했다. 어딘가에선 업무용 핸드폰이 따로 있어서 퇴근할 때 사무실에 두고 간다고도 했다.
조직 입장에서는 업무의 효율성과 생산성이 중요하겠지만, 퇴근 이후 또는 휴일에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급한 업무가 얼마나 될까. 효율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려는 오너의 욕심은 아닐까. 노동자라면 이에 저항해야 하는 것 아닐까.
스마트폰은 업무지시를 훨씬 가볍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근로시간 외 업무에 대한 이야기가 사담처럼 스윽 밀고 들어온다. SNS 메신저는 특성상 사적 대화와 공적 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특히 단체 메신저가 그렇다. 공동의 업무 때문에 강제로 묶여진 단체 메신저에서는 원하지 않았더라도 시도 때도없이 대화에 소환된다. 간단하게 업무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싶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게 불편했다. 일이 사생활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싫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때에 대화에 소환되는 것도 싫었다. 연결을 하거나 하지 않는 주도권을 찾고 싶었다. 스마트폰을 쓰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쓰기 전에 사용하던 피처폰을 꺼냈다.
피처폰을 쓰면서 '연결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었다. 그렇다고 SNS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므로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집에 와서는 SNS 메신저는 거의 하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개인적 채팅방도 있지만 업무와 관련된 채팅방도 있다. 그래도 별일없다. 시각을 다투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서 불편한 점은 낯선 곳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없다. 낯선 곳을 가게 될 때 길을 몰라 헤맬 때 스마트폰 길찾기 어플이 아쉽기는 하다. 나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곳에 갈 때는 미리 지도를 확인하고 그래도 헤매게 되면 사람들에게 물으면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다. 너무 많은 연결은 우리를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오롯이 나라는 존재로 있을 겨를도 앗아간다. 조금 단순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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