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27개 구간 중 오늘은 그 마지막 구간인 27구간을 종주하는 날입니다. 지난달 26구간 산행을 마친 태백시 통리역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서울 청량리역과 강릉역을 잇는 열차가 부지런히 오고갔던 통리역이지만, 2012년 이후 더 이상 기차는 지나가지 않습니다. 땅속으로 터널이 뚫렸기 때문입니다.
표를 산 뒤 기차를 기다리던 역사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 대합실 문을 지나 건너편으로 나가면 일부 남아 있는 철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와 철로는 그렇게 조용히 남아 천천히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문을 닫은 기차역의 쓸쓸함…오늘 산행할 거리는 10㎞,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오르내림도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산행을 시작하는 마음이 아주 느긋합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산행을 충분히 즐겨 보자고 마음을 먹습니다.
산길에 취, 곰취 같은 나물은 종종 보이는데 꽃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봄꽃은 이미 다 졌고, 여름꽃은 아직 이릅니다. 꽃이 없으면 없는 대로, 나무가 뿜어내는 맑은 공기나 흠뻑 마시자며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걸어갑니다.
산봉우리를 하나 넘어 내려가는데 저 아래서 꽹과리 소리가 들려옵니다. 순간적으로 굿을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접하기 쉽지 않은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발걸음이 급해집니다. 카메라에 담아 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갯마루에 내려서니 굿거리가 막 끝났는지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긴 뒤 차를 타고 떠납니다. 5분만 더 일찍 왔으면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영 가시지를 않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멍하게 서 있는 제 앞에 번듯한 성황당 건물이 하나 서 있습니다. 현판에는 '유령산영당(楡嶺山靈堂)'이라 쓰여 있습니다. 영당 앞을 지나가는 고개가 유령(楡嶺), 그러니까 느릅고개입니다. 느릅나무가 많아서 느릅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 고개는 영동지방에 속하는 도계와 영서지방에 속하는 황지를 잇는 큰 고개였습니다.
영동과 영서를 잇던 느릅고개사람 왕래가 잦았던 고개이긴 하지만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라는 큰 산줄기 두 개가 만나는 깊은 산속이어서 사람을 해치는 짐승 역시 많았을 것입니다. 호랑이, 표범, 늑대 같은……. 그래서 사람들은 열 명쯤 모여서 이 고개를 함께 넘었고, 고갯마루에는 산신당을 세워 고개를 넘나드는 이들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역사가 1천 년쯤은 될 듯한 이 산신당은 세월이 흐르고 전란을 겪으며 세우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97년 새로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굿을 마치고 떠난 당집을 살펴봅니다. 이런 집을 만나면 호기심이 일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봐야만 직성이 풀리는데… 이런, 자물쇠로 문을 잠가 놓았습니다.
옛날 같으면 이런 집은 꼭 제를 지낼 때만 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그네가 고갯길을 넘다가 날이 저물면 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몸을 눕히고 불편한 대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또 고개를 넘다가 갑자기 소나기라도 만나면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가 비를 그은 뒤 비가 그치면 다시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한데 지금은 아예 문을 잠가 놨으니 들어가기는커녕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습니다. 안에 모신 산신령도 무척 갑갑해 하실 것 같습니다.
산신당을 지나 오르막길로 들어섭니다. 두어 발짝 앞에서 "사사삭~" 작은 소리가 들립니다. 낙엽과 풀을 헤치며 뱀이 지나가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접근하는 소리에 놀라 살랑살랑 부지런히 도망갑니다. 살며시 따라가면서 카메라를 들이대 봅니다. 길이는 60~80㎝쯤, 거무스름한 점이 보입니다.(나중에 포탈에서 검색해 보니 '누룩뱀'이라고 합니다. 독성이 없고 사람 사는 주변에 많이 산다고 합니다.)
산속에서 만나는 누룩뱀과 제비나비사진을 찍는 동안 슬금슬금 달아나던 놈은 숲 저쪽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녀석을 사진에 담은 저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곱게 보내 줍니다.
검은색 제비나비도 자주 나타납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듯 귀티가 납니다. 날렵한 모습이 제비를 닮아 제비나비라는 이름을 얻었나 봅니다.
나비는 사람이 접근하면 날아가 버리니 사진에 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두 송이 크게 피어난 꽃이 아니라 자잘한 꽃이 수십 송이 달린 꽃에 앉을 때를 기다립니다. 아주 잠깐씩이지만 나비가 요것조것 정신없이 빨아 댈 때 셔터를 부지런히 누릅니다. 어차피 괜찮은 사진 한두 장만 건지면 되니까요.
작은피재까지는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지고 몸이 편안해집니다. 몸이 편해지면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지난 스물여섯 구간 내내 그랬듯이 오늘 스물일곱째 마지막 구간에서도 결심을 한 가지 해 봅니다.
제 삶을 바꿔 가는 결심… 오늘 결심은 앞으로 텔레비전을 멀리하자는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텔레비전을 치우지는 않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거실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습관은 없앨 작정입니다.
큰 즐거움을 위해 작은 즐거움을 버린다부인과 함께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다가 부인보다 먼저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중년 친구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도 삶의 한 가지 즐거움이고 활력소이겠지만, 저는 텔레비전 보는 시간에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땀을 흘리며 운동을 좀 더 할 생각입니다.
텔레비전은 '커뮤니케이션 노이즈'가 워낙 커서 텔레비전 앞에서는 어떤 일도 하기 힘듭니다. 책 읽기는 물론이고 대화도 나눌 수 없고 사색에 잠기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한 번 텔레비전에 빠지면 그 프로가 끝나야 빠져나올 기회가 생깁니다. 텔레비전 앞에 앉는 버릇을 아예 없애면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이 생기면서 삶의 질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면서 더 큰 즐거움을 찾으려고 합니다.
텔레비전과 완전히 '결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출구조사 공개로 시작하는 선거 개표 방송이나 남북 정상이 만나는 실시간 장면은 텔레비전이 아니면 즐길 수 없겠지요.
결심 27 / 텔레비전을 멀리하겠습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더 큰 즐거움을 찾으려고 합니다.작은피재를 지나 매봉산을 오르다가 중턱쯤에서 낙동정맥이 드디어 백두대간을 만납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이곳까지 370㎞를 걸어왔습니다. 금정산, 천성산, 정족산, 영축산, 신불산, 가지산, 단석산, 주왕산, 통고산처럼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산도 많이 거쳐 왔습니다.
분기점 바로 옆에는 피재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삼척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황지 쪽으로 가면서 넘던 고개여서 피재라 했는데, 지금은 삼수령이라고도 부릅니다. 삼수령에 떨어지는 빗물은 아차, 하는 사이에 운명이 갈립니다. 동쪽으로 미끄러지면 남대천을 거쳐 동해로, 남쪽으로 미끄러지면 낙동강을 거쳐 남해로, 그리고 서쪽으로 미끄러지면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갑니다. 세 갈래 물줄기가 갈라진다고 하여 삼수령입니다.
2016년 가을에 시작한 낙동정맥 종주… 2018년 여름이 돼서야 마무리를 합니다. 그간 결심한 스물일곱 가지 항목은 아주 잘 지켜서 몸에 밴 것도 있지만, 아직은 더 노력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힘이 있는 한 또 다른 산을 찾아 오르면서 제 삶을 바꾸려는 노력도 계속할 것입니다.
♤ 낙동정맥 27구간 종주날짜 / 2018년 6월 2일 (토)
위치 / 강원도 태백시, 삼척시
날씨 / 맑고 더웠음
산행 거리 / 10.3㎞
소요 시간 / 7시간 20분
산행 코스(북진) / 통리역 → 느릅고개 → 유령산 → 채석장 → 대박등 → 작은피재 → 낙동정맥 분기점 → 피재(삼수령)
동행 / 아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