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사각지대에 경계인이 있다
9월 12일 범정부 차원의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 대책이 발표되었다. 영유아부터 청년기까지 발달장애인의 생애 주기별 돌봄을 지원하며 취업연계까지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등급제와 일률적인 방안으로 개선 요구가 컸던 발달장애의 복지가 개선될 수 있으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몇 년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속해있는 경계인들은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까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립되고 있다.
경계인은 정서적이거나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있는 이들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동시에 '경계인'이라는 이름 아래 집결하여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적지향적인 뜻을 담고 있어 이 명칭 자체가 하나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적장애 등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인지적 비장애인들과 학습, 취업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 삶의 단계들에서 지적 장애인과 유사한 어려움을 겪지만 지적 장애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복지지원을 받을 수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또래 아이들과 비교된다는 것을 알고, 가족이나 학교와 같은 집단에서 질타 받는 분위기에서 자라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그룹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들'로 지적인 어려움이 없고 가벼운 정도의 자폐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이들로 가끔 '눈치가 없다'라는 말을 들으며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진단명으로도 진단되지 않는 '애매모호함'이 경계인을 표현하는 핵심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경계선 지능장애가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된 것은 2005년 9월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경계선 지능장애란 용어조차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경계선 지능장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경계인에게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앞으로 오마이뉴스에 경계선 지능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지속적으로 기고할 예정이다.
인터뷰 첫 상대는 최원재 청년 (25, 자폐 스펙트럼 장애)이다. 그는 8월에 '덕후전용' 네이버 스티커 작가로 데뷔했다. 평소 애니 덕질을 많이 하는 자신을 그대로 만든 캐릭터 스티커인데 '발 그림'에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경계인과 덕후, 두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9월 초 '서울 경계인 청년센터' 아자라마 카페를 방문했다.
- 안녕하세요? 덕후 스티커 잘 보았습니다. 저도 구매했는데요
" 감사합니다. "
- 죄송한 말씀이지만 흔히 말하는 발 그림 있죠? 막 그린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리뷰를 보니 내 취향이다 공감 간다 이런 말들이 있어요. 포인트를 아주 잘 잡은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제가 애니 덕질을 하는 덕후이고 주변에 덕질 하는 친구들도 많다 보니 SNS이나 실생활에서 잘 쓰는 덕후용어를 사용해 사람들이 많이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
- 주변에서 말하길 '최초의 경계청년 이모티콘 작가'라고 하더군요. 이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론 책임감도 느껴져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저도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친구들도 용기를 얻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 저는 혹 '경계인'이 붙은 타이틀에 거부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영광이라고 말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또 최원재 군을 직접 보고 이야기했을 때는 전혀 어려움을 가진 청년이라고 생각되지 않네요. 현재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 있나요?
" 저는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돌발 상황에 가끔 대처하기 어려울 때도 있고요."
-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요?
" 일반 사람하고 대화가 잘 안 통할 때가 있습니다. 제 의도와 다르게 말이 와전돼서 오해를 받거나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이 나올 때도 있어요. 또 저는 다른 사람보다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10대 때는 안 좋은 일이 있어 중학교를 자퇴하기도 했어요. 제 '흑역사'였지만 '성장학교별' (경계선급 어려움을 가진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에 입학하면서 저 자신에게 당당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수익이 생겨 적극적으로 덕질을 할 수 있게 되어 즐겁게 살고 있어요. "
-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계인이라는 용어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이라고 하면 덩치가 크고, 소리를 지르는 애들이라고 생각해요. 심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렇게 주변의 편견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특히 예술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친구들도 많고요. 미디어에서 경계인이 더 많이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잘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응원도 해 줄 수 있고요. 잘 알려지지 않아 오해하는 거죠. 나를 경계인으로 표현하는 것이 싫지는 않아요. "
- 경계인, 그리고 덕후에 대한 편견 이 두 가지에 모두 맞서는 용기 있는 청년이네요. 제가 알기로는 애니 덕후라고 하면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전에 화성인 바이러스에 인형 베개를 들고 애니 덕후로 나온 사람이 있는데 그 이후로 덕후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진 것 같아요. 그는 범죄에 연루된 적도 있고,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비호감으로 생각해요. 같은 덕후로서 민폐 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요즘엔 심형탁, 데프콘 등 연예인들이 덕후에 대해 좋은 인식을 심어줘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고, 애니 관련 행사들도 많아졌습니다. "
- 당당하게 자신을 덕후라고 말하고, 이 덕질을 SNS나 패션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 저는 사람들의 편견에 신경 쓰지 않아요. 아이돌을 좋아하거나 먹을 걸 좋아하는 것처럼 똑같은 덕후이기 때문에 이것이 특이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들을 존중하는 것처럼, 그들도 절 존중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죠. 저만의 철학이 있다면 덕질을 해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
- 주변에 비슷한 친구들이 많을 것 같아요. 보통 경계선급 어려움을 가진 청년들은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원재 군은 대인관계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일반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는 것을 용기 내서 이야기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주더라고요. 그래서 비슷한 취미나 아픔을 가진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되었고, 그 친구들이 저한테 고민 상담을 하기도 해요. "
- 고민상담을 해주는 멋진 청년이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아직까지 세상이 두려워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경계청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면 좋겠어요. 두려워하면 도망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들이 많으니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세요.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와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인관계든, 일이든 말이에요.
제가 근무하는 아자라마는 서울 경계인 청년센터로 경계선급 어려움을 가진 청년, 청소년을 위한 공간입니다. 매월 경계인을 위한 행사도 진행하고 있고요. 외롭다는 분들은 여기서 함께 소속감을 느끼고 혼자가 아니라고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
경계인, 그리고 애니 덕후. 누군가에겐 비호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두 개의 타이틀을 가지고도 전혀 흔들림 없이 그 용어로 자신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청년과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 중 그는 그와 다른 사람을 '일반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당당히 경계에 서 있는 그가 일반 사람보다 더 용기 있고 당당해 보인다. 경계에 있기 때문에 경계 밖의, 경계 안의 사람들도 함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경계인이 아닐까.
우리 모두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일반 사람, 일반이 아닌 사람이 아니라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경계인 청년들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