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밤 12시, 딸 희현이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파 울다 지친, 이제 겨우 3살 된 아이를 끌어안고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를 더 돌볼 걸. 이건 내 잘못이야. 이건 내 책임이야. 아이가 먼저지. 공부를 하지 말 걸.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내가 정말 끝까지 공부할 수 있을까?'
수백 번 자신을 탓했다. 다행히 밤샘 간호 속에 아이는 열이 내렸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검정고시 학원으로 향했다. 공부가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다. 조금 덜 자도, 조금 힘들더라도 아이와 공부, 둘 다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희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금, 나는 학사모를 쓰고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그날 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련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부하려는 의지만큼은 변함없다.
꿈은 애초에 없었다
내 이름은 하은주, 고향은 함경북도, 나의 가장 아픈 기억이자 가장 행복한 추억이 모두 이 곳에서 탄생했다. 계절 따라 아름다운 풍경이 있던 함경북도의 작은 마을, 친구들과 깔깔 거리며 등하굣길을 거닐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중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자그마한 삼거리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섰다. 책가방을 풀어놓기도 전, 엄마는 '내일부턴 학교에 못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장 먹을 게 없는 우리 집에서 교육은 사치였던 것이다. 다음 날부터 항상 같이 등교하던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먹을 걸 찾아 길을 나섰다. 나는 친구들 그리고 추억, 두 가지를 모두 잃었다.
꿈은 애초에 없었으니 잃은 것도 아니었다. 으레 다들 대학을 나오면 잘 산다고 해서 대학생이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내 신분을 생각하면 금세 꿈에서 깨어났다. 북한이라는 봉건사회에는 세 가지 신분이 있다. 핵심 계층, 동요 계층, 적대 계층.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는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살 길이 막힌 적대 계층이었다. 당에 아무리 충성을 해도 좋은 대학이나 좋은 일자리에 취직할 수 없다. 대학을 가거나, 직업을 가져봐야 유리병에 갇힌 벼룩이었다. 아무리 뛰어도 그 병을 넘을 수 없는.
나는 '장마당 세대'였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N포 세대라 부르듯, 북한에는 장마당 세대가 있다. 북한의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선 1980-90년대에 북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을 부르는 말인데, 이들은 무상교육, 무상배급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즉, 사회주의는 국가적 이념이었을 뿐 우리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장마당 세대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 당에 대한 고마움도 없다. 장마당 세대에게는 배고픈 현실만이 있을 뿐, 사상과 이념은 없었다. 나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굶고 떠돌아다니고, 장삿길에 오른 것이 한 세월이 되었다. 결국 살기 위해 이 곳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꿈을 품었다, 북한이탈주민을 돕고 싶다
너무 살고 싶어서 북한을 떠났다. 그리고 3개월 동안 3개국을 떠돌다 한국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한국땅까지 겨우 서울에서 부산 남짓한 거리인데, 그 짧은 거리를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멀리 돌아왔다. 3개월간 수많은 사람들과 살을 붙여가며 살아냈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하루를 버텨냈다.
하루하루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모르는 뜨내기 생활을 하다 보니 함께 탈북한 사람들 중에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PTSD를 앓지 않더라도 대부분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심지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한다.
게다가 한국 도착이 진정한 '탈북'의 끝이 아니었다. 다시 북송되지 않기를 바라며, 낯선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다시는 과거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이겨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마음이 생겼다. 그 고통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사람들과 연락하며 지내고 싶었지만 현실에 적응하며 각자의 삶을 사는 탈북민들. 나는 그들을 어딘가에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작은 꿈을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함께 온 북한이탈주민을 돕고 싶다.'
처음으로 가져본 꿈. 그 꿈은 한국 사회를 알아가며 더욱 선명해졌다. 한국사회에 적응하며 많은 사람들과 많은 기관에서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북한에는 없는 '사회복지'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아 내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의 싹이 피어났다.
공부, 나의 행복이자 고통
꿈이 생기자 행복해졌다. 내게는 검정고시 학원에 갔던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학원비를 내고, 등록을 하고,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나에게는 '꽃길'이었다. 그동안은 '배우는 것'과 먼 삶을 살았다. 가난, 천한 신분, 집 없는 떠돌이 생활, 이런 나에게 배움은 다른 세상의 말이었다. 한국에서도 적응을 위해 생존을 배웠던 것이지, '교육'은 여전히 욕심이었다. 그렇기에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한 날은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였다. 정말 행복했다.
다만, 그 꽃길에도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바로 육아였다. 당시 나는 한국에 와 가정을 꾸리고,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3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돌보며 학원 공부를 병행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정말 내 꿈은 이룰 수 없다.' 이 생각을 마음에 새기며 육아와 교육을 병행하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엄마 없이 아이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나는 수많은 밤을 아이가 잘 때까지 옆을 지키다 몰래 일어나 작은 스탠드를 켜고 깨알 같은 책 속의 글씨들을 읽어 내려가야 했다. 아이가 아픈 날에는 가슴을 치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엄마가 공부하느라 바빠서 아이가 아프다'라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내 생애 첫 꿈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 간절하고, 또 절박하기 때문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은 젊었고, 상대적으로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있었다.
내가 그들보다 더 가진 것은 오직 간절함 하나뿐이었다. 검정고시 시험을 치르던 해에는 4월, 8월, 두 번의 시험이 있었다.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던 나는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4월의 중등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바로 8월의 고등 검정고시 시험에 응시했다.
<다음화에 계속>
취재, 글, 삽화: 김하늘 에디터
*10월 LINK(Liberty in North Korea)와 함께 영화 '장마당세대' 상영과 탈북청년 취재원들이 참여하는 LIVE 토크콘서트를 엽니다. 신청: http://bit.ly/MediaNoon-LiNK
덧붙이는 글 |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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