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일주일 전 퇴근길,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발목을 접질렸다. 가벼운 염좌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과는 참담했다. 총 3개의 인대 중 2개가 완전 파열이란다. 병원에서는 인대 봉합수술을 권했지만, 일단 비수술적 치료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며칠의 입원 치료와 4주의 강제 깁스령이 내려졌다.
신체적 활동이 극도로 제약되는 입원 기간은 정말 괴로웠다. 하루 두 번 20분씩 물리치료실을 다녀오는 게 아니면 움직일 일이 없었다. 온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게 일과인데, 추운 날씨로 환기가 어려운 병실에 히터 바람이 더해져 정말 답답했다.
움직임이 적으니 소화 불량은 물론, 아픈 다리 대신 체중을 지탱해야 하는 반대쪽 다리와 양 손목에도 무리가 와 통증이 심했다. 보호자나 타인의 도움 없이는 다 먹은 식판 내어놓기, 전등 끄기, 물 뜨러 가기 등 작은 일도 혼자 해내기 어려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병실은 정말 환자를 환자스럽게 만드는 곳이었다. 꼭 필요한 치료와 근신이었다고는 해도 고생스러운 기억만 남았다. 큰 사고나 질병으로 병원 생활을 오래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울까.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퇴원 후, 본격적으로 목발 보행을 시작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굉장히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프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고나 할까. 인도에서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타는 사람을 보면 순간 충돌하진 않을까 긴장감이 들었다. 넘어졌던 곳처럼 튀어나온 보도블록, 길가의 흔한 턱이나 작은 홈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두 다리로는 한 번도 불편함을 몰랐던 대중교통 이용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출퇴근 시간이 훨씬 오래 소요됐다. 내려서 개찰구까지 올라가는 길,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출구를 찾아가는 길, 낯선 출구로 나가 목적지까지 돌아서 가야 하는 길 등이 모두 고행이었다. 역 안에서 흔히 지나는 대리석 바닥에서 목발 끝이 살짝 미끄러지는 느낌만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특히 출근 땐 다들 어찌나 서두르던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뛰는 발소리만 들려도 목발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다들 옷차림이 두꺼워진 요즘 같은 날, 에스컬레이터에서 누군가 휙 스치면 휘청하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리던 지난날의 나도 누군가에겐 큰 위협이 됐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크고 작은 불편함들로 몸은 항상 초긴장 상태였다. 동화 속 엄지공주가 된 느낌, 강아지 시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출퇴근 인파를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내 눈에 그들은 너무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긴장은 곧 피로함으로 이어졌고,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사실 요즘은 신체적인 불편함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바로 사람들의 불편한 친절이다. 상대방은 배려의 마음으로 베푸는 친절이 나에게는 곧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아프고 나서 사람들의 작은 배려가 고마웠던 경험도 많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저 약자를 무조건 도와야 해'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친절을 마주할 땐 복잡한 마음이 든다. 아니, 정확히 불편하다.
붐비는 월요일 아침, 역까지 걸어가는 게 어려워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님이 나를 부르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애기야~"
"(두리번거리며 흠칫) 저, 저요...?"
"응~ 여기 손잡이를 꼭 붙잡고 올라와서 조심조심 앉는 거야~ 꼭 버스 멈추면 내려야 해. 이동 중일 땐 절대 일어나지 마. 다칠까 봐 그래."
20대 후반에 접어들고는 들어본 적이 없던 파격적 호칭에 한 번, 마치 유아용 안전 매뉴얼을 보는 듯한 버스 이용 안내에 또 한 번 놀랐다. 물론 기사분은 단순히 환자를 돕고 싶었던 선의의 배려였겠지만,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이었다. 순간 버스의 모든 승객이 나를 쳐다보는 그 시선이 민망해서 얼굴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버스를 탈 줄도 모르는 무능한 존재로 취급받은 느낌이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유독 나에게만 몇 층에 사무실이 있는지 물었다. 사무실 출입카드도 찍어줄 것만 같은 자애로움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불편했다. 나는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기사도 타이핑할 수 있으며, 엘리베이터 버튼 정도는 충분히 누를 수 있단 말이다.
친절도 불편할 수 있다
대학생 시절, 시각장애인의 학습자료를 녹음해 주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들은 적도, 교육받은 적도 없었다. 늘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데, 살면서 익숙하게 마주한 적이나 관계 맺기 한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무조건적인 배려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도 역시 나름의 배려심을 발휘해 발음을 최대한 정확히, 또박또박 읽어 자료를 녹음했었다. 추후 내가 녹음한 자료를 들은 시각장애인의 평가를 듣고 아주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듣는 것에 일반사람보다 훨씬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느리고 장황한 녹음 자료가 더 불편했다고 한다. 당사자의 의견도 묻지 않았던 배려는 그저 '불편한 친절'이었을 뿐이다.
아니 그럼 어쩌란 말인가. 친절한 사람들은 배려하고도 욕먹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일상을 모두 경험해 보니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저 사람은 이런 도움이 필요하겠지"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마음대로 단정 짓거나 결론 내리지 않기 위해선, 의사를 물어보면 된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어떤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지, 정말 그 순간에 딱 그 도움이 필요한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살면서 누구를 대하든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약자, 무능한 장애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하면 의사를 물어보는 게 쉬워진다. 나는 다음 역에 내릴 건데, 여기 앉으라며 벌떡 일어나 허리를 톡톡 밀어주는 배려보다 "여기 앉으실래요?"라고 물어봐 주는 배려가 더 반갑다.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너무 '프로불편러' 같아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친절도 불편했던 누군가에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위로와 함께 친절이 친절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은 팁을 주고 싶었다. 오늘은 뭔가 말할 경황이 없었는데, 다음 주에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려는 그 분을 만나면 꼭 말해야겠다.
"감사해요, 그렇지만 저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요!"